까였다.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나노미터 단위로 까였다. 전자책이 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난 종이책이 더 좋다고 어딘가에 썼다가 환경 파괴의 원흉이라는 악플 세례를 받았다.
이럴 때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브런치 말고 다른 데서는 글 쓰지 않는 걸로. 어쩌다 다음포털 메인에 의도치 않게 실리면 그 글은 바로 내리는 걸로. 글 발행할 때 '혹시라도 다음포털 게시 원하지 않음(가칭)' 선택 가능 체크박스를 브런치 운영진에 지속적으로 건의하는 걸로.
나는 종이책이 좋다. 손에 잡히는 느낌, 종이 냄새, 책이 주는 묘한 에너지. 책의 그 물성이 좋다. 담고 있는 내용만 본다면 종이책과 전자책은 똑같지만, 종이책만 줄 수 있는 독서 느낌이 나에겐 크기 때문에 그 둘은 내겐 대체 관계가 되지 못한다.
요즘은 그 종이책을 바라보는 묘한 시선이 있다. 나중에 이것까지 문제 될 거라고 누가 알았을까. 기후 위기 문제가 심각하긴 한가 보다. 오죽하면 종이책을 예찬했더니 환경파괴범 주제에 무슨 고상한 척을 하냐고 떼욕을 먹을 정도일까. 심지어 북극곰이 어쩌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인식의 출발점은 '종이는 나무를 베어 만든다'이다. 나무를 베면 대기 중에 탄소가 늘고 탄소가 늘면 지구가 온난화되지 않느냐는 말이다. 이제 [종이책=지구온난화] 이 항등식이 머릿속에 공고히 자리 잡는다.
그런데 종이를 만든다는 건 숲을 베어내는 게 아니라 논에서 쌀을 재배하고 수확하듯 조림(생선조림 아님)을 해서 수확하는 거고, 베어 낸 곳에 새 나무가 자라 재조림하는 과정이다. 새 나무가 자라면서 기존의 나무보다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더 많은 산소를 생산하는 과정의 반복이다. 경작한 것이든 채취한 것이든 나무는 나무니까 환경파괴 아니냐고 하는 사람이 만약 있다면 그런 사람은 똑같은 이유로 채식도 하지 말고 육식도 하지 말고 좀비나 구울처럼 시체나 어기적 어기적 뜯어먹고 살면 될 것이다.
그분들이 그저 자기 하나 편하자는 걸 세상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는 것처럼 포장하려 든다고 보지는 않는다. 환경을 걱정하는 그분들의 마음은 분명 진심이라고 믿는다. 다만 전자책도 그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분들이 모바일 기기의 리튬 배터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원리로 작동하며 탄소는 그 과정에서 어떻게 관여하는지 알게 된다면 그런 말씀을 쉽게 못 하실지도 모른다.
나는 숫자를 싫어한다. 숫자를 잘 다루지 못해서가 아니라 숫자가 세상의 모든 답을 가진 듯 행세하는 게 싫어서. 하지만 지금은 숫자가 필요할 때다. 미국의 연구기관 Green Press Initiative의 분석에 의하면 종이책 한 권당 온실가스가 3.3kg, 모바일 기기 한 대는 130kg이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의하면 전자책 단말기 한 대의 1년 탄소 배출량은 종이책 22권에 해당한다. 1년에 23권 이상 사서 읽는 사람 아니면 전자책 볼 때 오히려 나쁘다는 거니까 나는 지금처럼 종이책을 보는 게 바람직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걸로...
비행기가 1km 이동할 때 승객 한 사람당 이산화탄소 285g을 배출한다. 인천공항에서 하와이까지 갔다 오면 4.3톤의 이산화탄소를 만든다. 비행기에 탄 모두가 47초에 1권씩, 한 사람당 1,300권의 책을 태평양에 버리고 온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까 지구 온난화를 막으려면, 저 귀여운 북극곰들을 살리려면, 종이책이 아니라 해외여행을 막아야 한다. 관광 목적의 출국은 개인별 10년에 1회로 제한하고 유명 해외 관광지 사진을 SNS에 올리는 사람들을 모조리 색출해서 벌금을 물리면 되겠다.
사람이 살려면 어차피 환경파괴는 불가피하니 대충 살자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우리 모두가 세상의 엔트로피를 높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이 문제를 조금 더 겸손하게 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바랄 뿐이다.
그런 생각이면 환경을 위해 전자책을 보자고 호소하기 전에 인쇄 잉크를 반만 써서 사람 눈에 똑같이 보이게 하는 방법을 고민할지 모르고, 콩기름으로 잉크를 만들 수는 없을지 고민할지 모른다. 종이책과 디지털 기기를 이분하고 ‘어느 쪽이 더 환경에 나쁜가’를 고민하기보단 어느 쪽이든 오랫동안 여러 번 활용하는 방법을 고민할지 모른다. 인간이 살아 숨 쉬는 한 뭐를 해도 탄소 발생을 막진 못하지만 지금 내 생각보다 더 좋은 방법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멈추지 않을 테고, 지구의 시선에선 어차피 인간인 이상 너도 바이러스고 나도 바이러스라지만 최소한 '종이책은 나무를 베어야 하니 전자책을 써야지'에서 생각이 끝나는 사람보다는 지구에 조금이라도 덜 해로운 바이러스로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카페에서 책을 읽다 나도 모르게 깜박 졸았다. 평소 같으면 인터넷 보고 있을 시간에 오후 내내 책에 빠져 있다가 미확인 카톡도 확인 안 하고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콘텐츠 접속하고, 알고리즘에 따라 다른 콘텐츠로 연결되고, 또 연결되고, 모르는 사람들 댓글 싸움 멍하니 구경하며 허비했던 그날보단 알찬 오후를 보냈다. 오늘은 환경적으로 성공했다. 이 정도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