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짝짓기 예능 프로그램을 자주 본다. 그런 걸 뭐 하러 보냐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커플 되든 말든 뭐가 중요하냐고. 맞다. 그들 중 누구랑 누가 사귀든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내 재미 포인트는 그게 아니다. 이런 프로그램에는 말, 말, 말이 넘쳐난다. 매 방영분마다 오가는 대화를 유심히 살펴보면 하나 확실한 게 있고, 하나 신기한 게 있다.
하나 확실한 거. 두 사람이 과거 시제보다 미래 시제를 많이 쓸 때 커플이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도 그럴 때 연인 또는 부부로 발전하는 비율이 높지 않은가. 헤어짐을 앞둔 두 사람의 사이엔 앞으로 함께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이야기가 없고.
하나 신기한 거. 제작진들과의 인터뷰에서는 세상 말 잘하는 사람도 이성과 단둘이 함께 있으면 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좋아하는 사람 앞이라서? 긴장해서? 그럴싸하지만 내가 보는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2]
원래 그렇게 달변이신가요?
8년 전. 면접관은 말했다. 이건 칭찬일까? 어딘가 묘한 느낌의 이 말. 순간 뭐라고 대답할지 몰랐다.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
살면서 말로 문제된 적은 혹시 없었나요?
... 당장 떠오르는 기억은 없지만 분명 있었을 겁니다.
소원 요정이 말 잘하기와 글 잘 쓰기 중 원하는 쪽을 나에게 주겠다면 내 선택은 말 잘하기이다. 아무래도 글쓰기보다는 말하기를 더 많이 하고 사니까. 그런데 만약 소원 요정이 제3의 선택을 허락해 준다면, 나는 '대화하기'를 말하고 싶다.
'말도 잘하는' 사람이 있고 '말만 잘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대화도 잘하는' 사람은 있어도 '대화만 잘하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없다. 대화를 잘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고 곰곰이 답해 보는 성찰을 습관화한 사람이다. 자신과 대화를 잘하는 사람이 타인과도 대화를 잘할 수 있고, 대화를 잘하려면 여러 능력들 중 하나만 모자라도 안되니, '말만 잘하는 사람'은 있어도 '대화만 잘하는 사람'은 내 기준에서 있을 수 없다.
[3]
새로 공무원이 되시는 분들 앞에서 강연을 하러 갔다. 일찍 도착해서 초빙교수실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저기 앉아 계신 분은 어쩐지 낯익다. 아, 저분은 30년 경력의 전직 공무원에 명강으로 이름난 그 유튜버. 말을 건네 보았다.
베테랑 강연자다운 전문성이 느껴졌다. 카리스마도 있었다. 다 탐나는 재주다. 그런데 어쩐지 대화 후 피로가 느껴졌다. 그분은 말씀을 잘하는 분이셨지만 대화는 그렇지 않은 분이셨다. 20분 정도의 대화에서 그분께서 가장 많이 쓰셨던 단어는 '나'였다. 그분은 내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깔때기처럼 '나'로 모으셨고 나는 말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다.
대화에서 공감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이가 있을까?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의 얘기를 하느라 상대의 말을 좀처럼 듣지 못하는 사람이 제법 많다. 심리학에서는 '전환반응'이라고 하는 그것. "요즘 내가 몸이 안 좋아"라는 사람에게 딴엔 공감한답시고 "나도 안 좋은데!"라 말하기. 심지어 '라떼는 말이야'조차 원래는 공감이 목적이지만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상대의 이야기를 자신의 스토리로 바꿔 놓는 화법은 상대에게 피로감을 준다.
이제는 어딜 가도 정신과 병원이 많지만 예전에는 사람들이 점집이나 타로카드를 많이 찾았다. 한동안 그런 분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쩌면 그건 뭔가 뾰족한 답을 얻으리란 기대보단, 그나마 점쟁이는 내 말에 귀라도 기울여 줘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최소한 점쟁이는 그렇게 남의 얘기를 자기 얘기로 바꿔 버리지는 않으니 그랬던 건 아닐까? 말하는 이는 넘쳐나고 듣는 이는 드문 세상에서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어. 잠깐만. 나도 그랬는데. 일을 하느라 바빠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사람에게는 내가 오래전 잠깐 학원 일을 하다 한밤중까지 쉬는 시간도 없이 수업하느라 저녁식사는 남의 얘기였고 집에 오면 팔이 아파서 숟가락을 들어 올리지도 못했다는 말, 오래전 군대에선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로 연속 4일을 굶고도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는 말, 처음엔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견딜 만하더라는 말, 말, 말... 어쩌자고 그랬을까. 왜 상대의 얘기를 내 얘기로 빨아들여 버렸을까. 왜 상대의 마음으로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을까.
수백 명 앞에서 말하기보다 일대일 대화가 더 어렵다고 생각했다. 다대일의 전달행위와 일대일 대화는 서로 다른 근육이 발동하는 일이라서 어느 쪽이 더 어려운지는 사람의 성격에 따라 다르다고 믿어 왔다. 이제야 알겠다. 이건 그저 나 혼자 대충 결론짓고 편하자는 생각이었다. 다수가 오히려 편하고 일대일이 어려웠던 진짜 이유는, 나 역시 말은 잘해도 대화는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4]
내면이 시끄러운 사람은 바깥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타인의 말을 듣기 위해 필요한 건 적절한 말없음이다.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상대가 뭘 기억하느냐다. 누군가의 말을 그저 듣기만 했는데 '정말 고마워.'라는 말이 돌아온 적이 있다. 나는 잠자코 있다가 어딘가에서 함께 화를 낸 게 전부였는데, 정말 고맙다니. 들으려는 내 마음이 간절해지면 상대도 침묵에 깃든 내 마음을 듣는구나. 이 하나를 아는 데에 그렇게나 오랜 세월이 필요했구나.
브런치의 한 작가님께서 댓글로 이런 요지의 말씀을 주신 적이 있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이도 좋지만 더 좋은 건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사이라고. 그런 침묵은 말없음으로 성립하는 게 아닌, 소리가 멈추는 곳에서 시작되는 가장 평온한 전달이다. 한밤의 배드민턴처럼 부드러운 곡선으로 셔틀콕을 주고받는. 빠르게 가다가도 그 사람 앞에서 느려지는. 높이 가다가도 그 사람을 보고 내려오는. 그런 대화를 하고 싶다.
넘겨주세요.
내가 받을게요.
이제 당신 위로 쏟아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