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증언에 의하면 내가 생애 최초로 말한 문장은 "할아버지, 개구리가 되어 봐!"였다고 한다. 석가모니는 천상천하유아독존, 율곡 이이는 석류피리쇄홍주, 배가본드 놈은 '할아버지, 개구리가 되어 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이 배가본드라는 놈은 일찌감치 싹수가 노르딩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다음으로 구사한 문장이 "할아버지, 나랑 한번 싸워 볼래요?"였다. 여기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이 다른데 어머니의 기억에서는 두 문장의 순서가 반대이다. 그런데 두 분의 기억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보통 아버지 쪽의 기억이 정확했기에 나는 '할아버지, 개구리가 되어 봐!'가 첫 번째 문장, '할아버지, 나랑 한번 싸워 볼래요?'가 두 번째 문장이었다고 알고 있다.
가끔 어떤 말을 하려다가 자칫 의도치 않게 자랑이 되어 버릴까 봐 말을 참을 때가 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런 순간이 문득문득 찾아온다. 요즘 이런 일이 부쩍 많아졌다. 왜 이럴까.
내가 특히 신경 써서 자체검열하는 건, 어떤 주제에 대한 내 생각을 죄다 쏟아놓고 싶어 하는 모습이다. 요즘 유명한 <박용우의 스위치온 식사법>에 대해 동료들 몇몇이 나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그냥 묻는 말에만 답하면 될 걸 구구절절 사족을 단다. 괴로울 때 참는 요령만 알려줘도 충분한데, 3주 차의 간헐적 단식은 체지방을 쥐어짜는 거라는 둥, 이때 공복 유산소 운동을 하면 더 효과적이라는 둥, 현기증이 오는데 이때 우울한 생각에 자학적 생각까지 몰려오더라는 둥, 그때를 참냐 못 참냐가 관건이라는 둥, 먹는 것의 즐거움은 잠깐이지만 몸이 완성된 희열은 오래간다는 둥, 온갖 무용담을 늘어놓고 싶은 욕망을 자제하지 못한다. 나는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걸까, '박용우 스위치온에 이다지도 해박한 나' 이게 되고 싶은 걸까?
어른이 된다는 건 한편으로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보다 앞서는 상태이기도 하다. 상대의 기분을 살피고, 상대가 원하는 말을 떠올리고, 상대의 감정선에 집중하기보단 그저 자기 생각에 빠져 자기 이야기를 침 튀겨 가며 늘어놓기에 바쁜 일종의 자폐적 상태로 돌입하는 것이다. 결국 상대방을 위해서 하는 말이라기보단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하며 내 속을 비워내기에 급급한 '증상'일 뿐이다.
유튜브 <한사랑 산악회>에 딱 그런 기성들이 나온다. 상대의 감정은 전혀 살피지 못하고 자기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어른들의 불통을 그린 콘텐츠. 이들에게 필요한 건 자기 이야기를 하염없이 들어줄 사람, 자기를 칭찬해 줄 사람뿐. 라떼 스타일 기성들에게서 흔히 보는 모습을 극사실주의로 그려낸 이 콘텐츠에 박장대소하다가, 갑자기 무서웠다. 저런 분들은 자신도 모르게 저렇게 되셨을 텐데, 나 역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나, 집에 가면 너만 한 아들이 있어!" : 그러면 상대방도 집에 가면 그 나이의 부모님이 계시다는 건데 자식 같은 사람들 앞에서 그러고 싶을까? 내세울 거라곤 세월뿐인 이들에겐 시시비비를 가릴 문제 앞에서도 세월에 관한 뜬금도 없고 맥락도 없는 당위가 우선할 뿐이다.
"내가 왕년엔 말이야" : 아니 그렇게 빛나는 한 시대를 풍미한 분께서 무슨 말 못 할 사연이 있어 이 지경이 되신 걸까? 그토록 찬란했던 왕년에 어느 정도는 부합하는 금년이라야 좀 속아주든 말든 할 것 아니겠는가?
"나도 그때를 겪어 봐서 아는데..." : 그렇다면 자신이 늘어놓고 있는 말을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턱이 없고 그렇다면 굳이 누가 멈추라고 하지 않아도 도저히 계속할 수가 없을 텐데. 지금의 너희들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힘든 나날을 지내왔다는 이야기만 주야장천 늘어놓지만, 그런 생각으로도 삶의 여정을 별로 힘들지 않게 지나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랴?
<한사랑 산악회>에서 묘사하는 기성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 어른이 된다는 것에는 퇴보적 속성도 있다. 분명 시간이 가며 뭔가 누적되는 과정인데, 그게 시간의 누적일 뿐 의식의 누적은 아니라고 느낄 때가 있다. 왜 그럴까? 세월이 가며 경험치도 자연스레 늘어나는 건 맞지만, 문제는 내가 뭐든 잘 안다는 생각은 그보다 빠른 속도로 커진다는 사실이다. 결국 실제의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와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점점 '자기 세계 + 자기 말' 이 둘밖에 존재하지 않는 늪에 빠져든다.
요즘 드는 생각은, 내가 나와 싸우는 일을 전보다 자주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어도 멈추고 듣는 데에 더 집중하고, 어쩌다 자랑거리라도 생겼을 때면 내 이야기를 쏟아내고 싶은 욕망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일을 의식적으로 해야 할 것 같다. 그걸 늘 염두에 두고 있지 않으면 중력에 의해 주름살이 자연발생하듯 어른이 되며 자연발생하는 퇴보의 늪에 언제 어느 날 꼴깍 잡아먹힐지 나 자신도 모른다.
브런치에서 작가보다 독자로 존재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내게도 글 발행 권한이 있긴 하지만 '90% 독자, 10% 작가'라는 내가 정한 기준을 브런치 시작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3년째 지키고 있는 건, 작가랍시고 신나게 내 글만 쓴다는 건 내겐 곧 자기 삶만 살다 죽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에게 쉴 새 없이 싸움을 걸 줄 아는 게 더욱 중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사람은 성인이 되면 나이에 관계없이 그 안에 흑화된 할아버지(할머니)가 살고 있고 그 할아버지(할머니)와는 자주, 부지런히 싸워야 된다.
"할아버지, 나랑 한번 싸워 볼래요?" 이 말을 세월 지나 또 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할아버지, 개구리가 되어 봐!"라고는 말할 일이 없으니 다행이다. 그랬다면 내 삶이 통째로 하나의 거대한 수미쌍관의 서사가 되었을 텐데 그건 지나치게 장엄하다. 그러니 비록 공식적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내가 말한 최초의 문장은 어머니의 기억인 "할아버지, 나랑 한번 싸워 볼래요?"가 아니라 아버지의 기억인 "할아버지, 개구리가 되어 봐!"였다고 박박 우기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