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잘 쓰지도 못하면서 왜 쓰냐?"
학창 시절 누나는 말했다. '넌 예쁘게 말하지도 못하면서 왜 말하냐?'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그렇게 말하면 나는 더욱 억울한 상황에 처할 게 뻔했다(서열을 절대시하셨던 부모님은 누나에게 대드는 행위는 이유가 뭐든 용납하지 않으셨다). '잘 쓰지도 못하면서'보다 '왜 쓰냐?'가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과거에 운동을 한 적이 있다고 하면 나를 위아래로 쓱 훑어보는 사람이 있다. 우락부락한 용모에 육중한 몸을 증거로 기대하는 것이다. 예전부터 골프를 좋아했다는 동료에게는 어김없이 타수를 묻는다. 복싱을 오래 했다는 동료에겐 대뜸 대회 출전과 수상 경력을 묻는다. 그만큼 했으면 당연히 이 정도 경지에는 이르렀겠지 하는 시선이 어딜 가도 따라붙는다. 그저 재미있기만 한 사람은 슬그머니 삭제된다.
뭐든지 하면 는다. 느는 과정은 즐겁다. 그런데 그 성과를 '검증'하려는 타인의 접근은 즐겁지 않다. 쉬려고 떠난 여행마저 배우고 느낀 게 있어야 한다는 한국인의 혈관 속을 흐르는 성과주의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젠 '취미에도 성과 지표를 도입하라'는 국민 계몽까지 대놓고 나오는 판이다. 무엇이든 최고가 되거나 어떤 경지에 올라야만 하는 걸까? 취미라도 그러지 못하면 그만둬야 하는 걸까?
보통 글쓰기를 하는 이유는 내면을 가다듬으려고, 난 누구며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인지 알려고, 일상의 기록을 남기려고 등이다. 내 이유는 둘이다. 첫째, 못해도 되는 거라서. 둘째, 찐따같이 못해도 되는 거라서. 직업은 물론 취미마저 오래 하면 어느 이상은 해야 한다는 생각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지만 글쓰기만 그렇지 않아서. 글쓰기는 우승이니 수석이니 금메달이니 하는 것들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빼어나게 잘하거나, 누군가와 겨뤄 이기거나, 그걸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필요가 없다. 굳이? 굳이!
뭔가를 못하면 안되는 세상에서만 살았다. 얼마든지 못해도 상관없는 세상, 그런 세상의 존재를 몰랐다. 나는 이제 못해도 되는 세상에서 사는 시간을 늘리려 한다. 만약 나중에 글쓰기 말고도 그런 세상을 또 발견한다면, 나는 동시에 그 세상에서도 살 것이다.
내가 아는 글쓰기의 궤적은 달성-전진-달성-전진을 반복하며 계단을 쭉쭉 오르는 모양보다는 에스컬레이터를 거꾸로 오를 때의 궤적에 훨씬 가깝다. 어제의 어려움이 날 거쳐가지 않고 똑같은 어려움에 직면하기 일쑤다. 그러니 얼마나 멀리 가느냐보다 얼마나 꾸준히 나가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느냐일 텐데, 다행히 나는 무척 단순한 사람이라서 할 줄 아는 게 반복밖에 없으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못해도 괜찮아' 그 훈기 넘치는 말을 살면서 육성으로 언제 들어 봤던가. 누가 내게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은 없다. 글에서 보고 시원했던 적은 있지만 나 하나를 콕 찍어서 주는 말이었더라면 시원하고, 따스했으리라.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고, '억지로 하고 있지 않다?' 혹은 '억지로 할 필요가 없다?'와 같은 느낌이랄까. 글쓰기로 직업을 삼을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행위 중 하나지 이 자체에 '최고'나 '누구보다 잘해야 함'같은 수식어가 달리지 않기 때문이다. '해야 한다'라는 의무감보다는 '선택했다'라는 기분 좋은 설렘이 가득한 행위다.
<준최선의 글쓰기(브런치 내민해 작가님). '23.8.4.>
못한다고 말하기란 대상에 대해 능숙해질 이유나 필요를 소거하는 행위로서 스스로에게든 타인에게든 부리는 일종의 엄살이기도 하지만, 못한다고 말하는 순간 잘할 필요가 없어지는 자유, 작지만 선명한 자유가 생성되고 나는 그 소박한 감각의 환기가 좋아 자주 말한다. "저는 못합니다."
<문학동네 p.206 <시차노트>_김선오>
못해도 괜찮다는 건 무성의하게 하려는 생각이 아니다. 얼마든지 못할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잘하게 되든 그렇지 않든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잘하는 게 아니라 오래 하는 게 목표임을 잊지 않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오래 하다가 졸지에 잘하고 있는 불상사가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통크게 용서하고 받아들일 생각이다.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얼마든지 못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는 편안함으로, 오늘도 공책을 펼치고 연필을 집어든다. 그런데 브런치 글벗 작가님들은 왜 아무도 저에게 "작가님, 못해도 괜찮아요."라고 안 말해 주시나요? 다들 쵸큼 서운해지려고 합니다.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