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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Apr 15. 2024

살며, 글 쓰며, 위로받으며

메일을 하나 받았다. 알지 못하던 분이다. 브런치의 제안하기 기능으로 보내신 듯하다. 글로 많은 위로를 받아 고맙다는 말씀이었다.


위로라니. 이런 글들도 누군가는 읽는다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무려 위로라니.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쁘고 고마웠다. 믿기 어려울 정도라 하는 이유는, 정작 나는 글 쓸 때 누군가를 위로하려고 쓴 적이 없어서이다. 내가 글을 쓰는 건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었고, 어쩌다 위로를 해도 그 대상은 늘 나 자신이었으니까. 나쁘게 말하면 나는 어쩐지 좀 이기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누구나 하나씩 스토리를 품고 살아간다. 저마다 가슴속 어딘가에 말 못 할 아픔을 묻고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한 채 살아간다. 그중에는 세상의 부당한 폭력으로 입은 상처를 평생 부여잡고 살아가는 사람, 말도 안 되는 일로 소중한 사람을 잃고는 고통을 평생 짊어지고 사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나는?


별일 없었다. 아예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체로 평탄한 길이었다. 단기적으로는 등락을 거듭했어도 장기적으로는 매끈한 직선에 가까웠다. 어떨 땐 아주 큰일이 난 것만 같고 그야말로 더는 못 살 것처럼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면 모든 건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뿐이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던데, 내겐 가까이서 보면 절벽이고 멀리서 보면 평지다.


그런 내가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을까. 선뜻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고통을 어느 정도로 느끼며 살아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런 내가 읽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어한다면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이다. 겪어 보지 못한 고통까지 품을 수 있는 커다란 메시지를 담은 글을 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내 능력 밖의 일이다.


꿈은 큰 게 좋지만, 꿈만 큰 건 싫다. 그래서 글을 쓸 때도 뭔가 웅대한 포부를 갖기보다는 나 하나만이라도 잘 들여다보자는 생각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내겐 그 하나도 퍽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만이라도 잘해 낸다면, 어느 운수 좋은 날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읽고 위로를 받는 일이 어쩌다 얻어걸리듯 생겨날 수는 있다. 그런데 그 이상은 생각할 수가 없다. 모르는 분으로부터 글을 읽고 위로받을 수 있어서 고마웠다는 기쁜 말씀까지 들어 본 지금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나 위로하려고 거기서 그러고 있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고마워.

그럼 나는 어느 때 위로를 받았는가? 글쓴이가 위로를 의도한 글에 위로받은 기억은 없다. 내가 누군가의 글을 읽고 위로를 받았다면 그건 거의 그냥 잡담 같은 글이었다. 나에게 위로가 된 글들은 하나같이 그저 자기 이야기를 할 뿐이었고, 자기를 들여다보는 글이었을 뿐이다. 그게 나의 어딘가에 닿아서 결과적으로 위로가 되었을 뿐 하나같이 글쓴이가 그걸 의도한 걸로 보이진 않았다. 나에겐 그런 글이 위로였고 힐링이었다.


생각해 보면 내 글도 그저 잡담일 뿐이다. 어쩌다 그게 누군가에게 날아가 닿으면 그 사람이 위로받았다고 느낄 뿐이다. 아파트 옥상에서 재미 삼아 색종이를 접어 날린 종이비행기가 길 가는 누군가의 바로 앞에 톡 떨어졌을 때 그가 휴대폰을 꺼내어 자기 발 앞에 떨어진 종이비행기를 찍고는 '오늘 발견한 예쁜 것'이라고 생각해 주면 기쁜 일이 되겠지만, 길 가는 누군가의 발 앞에 미사일 정밀타격하듯 정확히 떨어져서 예쁜 것으로 길이길이 기억되라고 비행기를 접어 날리진 않는다. 이 행동을 아주 많이 해 본 입장에서 그 마음을 말하면, 나는 그저 날아가고 싶을 뿐이다.




글쟁이에게 글쓰기의 최대 장애물은 뭘까? 글감의 고갈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글과 비교하는 습관일 수도 있고, 글쓰기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그건 '그 자신이 설정한 작가의 자격조건'이다.


전엔 됐는데 지금은 안되는 것들이 점점 늘어난다. 어느 날 새로운 사건이 생겨서 전엔 없던 금지를 낳고, 그 금지를 피해서 새로운 사건이 생겨서 또 다른 금지를 낳고, 이 과정을 무한히 반복하며 뭐는 이래서 안되고, 뭐는 저래서 안되고, 갈수록 안되는 것들만 늘어가는 것처럼, 처음엔 출간을 하지 않았으니 작가가 아닌 것 같다가, 어느 이상 자주 쓰지 않으니 작가가 아닌 것 같다가, 다른 이가 내 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니 작가가 아닌 것 같다가, 이젠 읽는 이에게 위로를 주지 못하니 작가가 아닌 것 같다가... '내가 작가라 할 수 없는 이유'는 갈수록 많아지고, 글쓰기 엔트로피는 그렇게 늘어난다.


그나마 다행히 내 경우는 글 쓰는 곳을 브런치로 옮기고 나서는 어려워서 못 읽겠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일기는 일기장에나 쓰라는 얘기는 들어 본 적 있지만 그건 남들도 대부분 들어 보는 말인 듯하고, 그저 내 안을 들여다보는 수준에 영원히 머물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작가의 자격조건 v1.0'에서 v2.0을 만들고, v3.0을 만들고, 이러다가 읽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글을 쓰겠노라는 황당한 꿈을 꾸고 싶진 않을 따름이다.


비가 그친 봄날 밤. 내일은 다시 따뜻하겠지. 따스한 봄바람을 타고 두둥실 날아가고 싶다.

그림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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