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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Dec 04. 2022

에세이 쓰기는 어려워

현가본드가 글가본드를 잡아먹어 버렸다. 2주 정도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 쓰기도 읽기도 할 수 없었다. 피드에 있는 구독 작가님들 글 읽기도 거의 하지 못하고 멍하니 정신줄 놓고 보냈다. 글을 쓰려면 좁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 무거운 철문을 열고 고도 집중 상태로 들어가서 사유를 끄집어내야 하는데, 그 철문을 열어젖힐 힘이 없는 상태에서 억지로 뭔가 써 봤자 알맹이 없게 될 것만 같았다.


조용히 서랍을 정리했다. 2/3 정도가 버려졌다. 어차피 놔둬 봤자 글로 완성되지도 못할 것 같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내가 가장 읽기 싫어하는 글은 가르치는 글이다. 그건 쓰는 사람 자신을 위한 글이다. 머리에 남는 게 없고 울림도 없다. 사람들은 자기 안의 생각을 끄집어내는 문을 열려고 글을 읽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서 가르침을 받으려고 글을 읽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내가 그런 글을 쓰고 있었다. 내가 독자가 됐을 때 가장 읽기 싫어하는 글을 정작 나 자신이 쓰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내 생각을 타인의 생각보다 위에 올리려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알려주겠다.' '너를 가르치고 말겠어.' 이런 끔찍한 계도적 모습까지는 아니지만,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모양을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이런 사고야말로 으뜸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깔고 있는 현시적인 글을 서랍 속에 잔뜩 넣어 놓고 있었다.


현시적 태도에는 지식을 펼쳐 보이고 싶은 현학적인 태도뿐 아니라 나의 사고에 다른 이에게는 없는 뭔가가 있음을 드러내고 싶은 태도도 포함된다. 장강명 작가의 <책 한번 써봅시다>라는 책에 의하면 그건 지식 말고도 도덕적 우월감, 예민한 감수성, 사회 비판의식, 아름다운 문장, 유머 감각일 수도 있다고 한다. 누구도 그런 욕구에서 완전히 자유롭긴 어렵고, 현시적 태도는 글 쓰는 사람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행간에 슬쩍 끼어들어서 글을 망쳐놓고, 이런 행위의 성격상 습관이 되기도 쉬워서 더 무섭다.


그렇게 보면 진솔한 에세이가 세상에 정말로 있긴 한 걸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고민일지도 모르는데,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 나의 고민은 오직 생활에서 어떤 글감을 뽑아내어 어떤 결론으로 끌고 갈지 거기에만 골몰해 있는 초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존경하는 관심작가님들, 그중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예전 글들을 다시 읽어 보았다. 정자세로 집중하지 않아도 글이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그분들과 나의 차이를 살펴보았다. 사람이 좋으면 글도 잘 읽히지만, 처음에 내가 그분들을 모르던 상태에서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분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오로지 생각과 감정을 나누려고만 할 뿐 자신의 생각을 타인의 위에 놓으려는 모습이 없었다. 심미적인 표현이나 유머감각을 보여주면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표현을 구사하는 나' '이렇게 통찰이 깊으면서도 위트까지 겸비한 나' 이게 전혀 아니었다. 나는 알지만 남들이 모르는 내가 있고 나는 모르지만 남들에게만 보이는 내가 있는데, 글 쓰는 사람이 갖는 현시적 태도는 그 자신보다 타인이 훨씬 더 정확히 간파하는 후자에 훨씬 가깝다고 느낀다.


앞으로는 퇴고를 할 때 비문, 맞춤법, 글의 흐름 같은 일차원적인 것들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글에 현시적 태도가 담겨 있지 않은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식이면 글쓰기가 어려워지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글쓰기가 쉬워지길 바라지 않는다. 실제 글쓰기 실력이 어떻든 글쓰기는 어느 정도 어려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나에겐 변함없이 쉽지 않은 일로 남아 주었으면 좋겠다.


가볍게 기지개를 켠다. 이제 또 글을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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