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_최은영>
<제목>
비 밀
<지은이>
최은영
<장르>
소설 (단편소설)
<등장인물>
말자(할머니), 영숙(딸), 지민(손녀)
말자는 학교를 못 다니고 글을 모르는 채 살았던 우리가 아는 그 시절의 여성이다. 어렸을 때 호기심에 오빠를 따라 학교에 갔다가 엄마에게 뺨을 맞은 일이 있다. "어딜 여자가 학교를?"이 그 이유였다.
그런 말자에게 글씨를 가르쳐주는 이가 있었다. 손녀 지민. 지민은 학교에서 글씨를 배워 와서 할머니에게 그대로 가르쳐 주었다. 지민은 맞벌이 부부인 부모님보다 할머니랑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자연스럽게 말자와 지민의 정서적 거리는 가까웠다. 지민이 받아쓰기 쪽지시험에서 100점을 받아 오면 말자는 지민의 손을 잡고 시장에 뛰어가서 아 글쎄 얘가 내 손녀인데 학교에서 백 점을 받았다며 자랑하다가 아이고 할매 또 시작이네, 노인네가 주책바가지라며 동네 사람들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다.
지민은 교사가 되고 싶었다. 학생들이 좋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게 좋아서. 지민은 나중에 그 꿈대로 사범대학을 졸업했고, 정식 교사가 되려고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기간제 교사로 일하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말자의 딸이며 지민의 엄마인 영숙은 말자에게 지민의 근황을 전했다. 지민이가 중국의 시골 학교에서 일을 하게 됐는데, 깊은 산골짜기라서 전화도 안 되고 우편배달부도 들어갈 수 없어서 소식을 주고받지 못하고, 할머니한테는 미처 말하지 못하고 가서 미안하다는 말을 꼭 전해달라 했다고.
건강하기만 하던 사위(=영숙의 남편)는 그 무렵부터 어금니가 빠질 정도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말자의 눈에는 딸 영숙도 어딘가 고단한 삶을 억지로 견뎌내는 듯했다. 말자는 암 환자인 자신 때문에 딸과 사위가 힘들어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손녀가 중국까지 가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게 기특했다. 하지만 손녀가 보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던 말자는 지민의 생일에 영숙의 집으로 가서 주인공이 빠진 식사를 하고는 지민의 빈 방으로 들어갔다. 지민이 자주 입던 옷을 걸쳐 보고, 지민의 체취를 느끼며 지민에게 배웠던 한글로 지민에게 손글씨로 편지를 쓴다. 아마도 그 자신이 얼마 후 지민에게 직접 줄 편지를.
".... 할매 독감 걸려 입원했을 때 기억나냐. 학교 끝나구 책가방 메구 너가 잘 찾아왔잖혀. 체육복 바지 무르팍에 풀물이 들어 있더구나. 너 여기가 어디라구 온겨 하니까, 너가 손에 든 걸 주더라. 네잎 크로바 세 개였어. 너가 그걸 내 손바닥에 올려 놓구 할머니 죽지 말고 아프지 말라 했잖여. 할민 그런 니가 귀여워 웃었는데 네 눈에는 눈물이 차 있더구나. 지민아, 이상허지. 그땔 생각하면 아직두 가슴이 먹먹혀. 내가 뭐라구 바지에 풀물이 들 정도로 그걸 찾구 있었냐. 내가 뭐라구... 나의 귀염둥이, 나의 아가야..." (말자가 쓰는 손편지 중)
지민은 글 속에서 홀연 사라진다. 읽는 사람의 가슴 먹먹함만 있을 뿐, 그 무엇도 지민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말자뿐만 아니라 내게도 비밀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은 세월호 참사 이야기였고, 지민은 문제의 그 학교의 기간제 선생님이었으며, 그날 밤 학생들과 그 배에 타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는 말했지. 취기가 실린 바람은 눈물과 웃음의 순서를 헷갈리는 경향이 있었다고. 그렇구나. 그것은 경향이구나. 현상이 아니라 경향이구나. 칵테일이 넘어간다. 책장도 넘어간다. 문학카페의 칵테일에 바스락 취한 소설책의 마지막 책장이 꼴깍 넘어간다.
꼴깍.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한 작품을 본 적은 있지만, 선생님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간 건 처음이다. 그러고 보니 바닷속 교사가 되어 보진 못했구나. 정작 배를 운전하는 사람도 도망가고 없는데 천천히 가라앉는 배에서 마지막 남은 학생 한 명까지 탈출하는 걸 보려 했을 선생님을 난 까맣게 잊고 살았구나. 사람들로 하여금 익숙하던 것을 전과 다른 관점에서 보게 만들고 그렇게 세상을 보여준다면, 그게 작가의 가장 소중한 역할 아닐까.
만날 수 있는 사람, 가 볼 수 있는 곳, 해 볼 수 있는 배역. 우리 삶 속 모든 것이 시간의 제약에 묶여 있다. 하지만 책 속에서 가 볼 수 없는 곳을 가고, 머물 수 없는 시간 속에 머물고,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난다. 책 속에서 시인이 되고, 탐정이 되고, 범인이 되고, 동물이 되며, 식물이 되기도 한다. 책 속에서 다른 이의 행복과 불행, 사랑과 이별, 성공과 실패를 그들의 시선 각도로 바라본다.
삼월의 마지막 날에 벚꽃 핀 남쪽을 향하는 고속도로의 어느 휴게소에서 누군가와 호두과자를 함께 먹곤 호두과자가 원래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것임을 그제야 처음 안다면. 누군가와 아침을 열어젖히며 서로의 입에 따뜻한 바게트를 찢어 넣어 주다가 그냥 바게트와 갓 구운 바게트는 아예 다른 빵임을 그제야 안다면. 가시거리 안으로 누군가를 끌어당기고 안경은 벗어 버리는 이유가 그 사람 말고는 세상 무엇도 보고 싶지 않아서라면. 그렇게 자기와 닿은 사람의 시선 각도를 조정해 주는 사람. 내가 생각하는 진짜 작가란 그런 것이다.
나는 공감능력이 낮은 사람이다. 타인의 입장과 마음을 헤아리는 데에 취약하고, 어떤 이야기를 듣고는 말하는 사람의 감정 수준으로 느끼는 게 어렵다. 게다가 내게 그런 결점이 있다는 사실을 아직도 알지 못하니 별 문제의식도, 단점을 고치려는 노력도 없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제자리만 뱅뱅 돌고 있을 뿐이다.
시력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고등학생 때 처음 알았다. 어느 날 친구 안경을 무심코 써 봤는데, 세상은 내가 봐서 알던 것보다 훨씬 선명한 윤곽, 훨씬 많은 디테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기 전까지 칠판 글씨가 잘 안 보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스스로 몰랐다.
뭔가를 깨달을 기회는 그렇게 파도를 타고 해변으로 두둥실 떠밀려오듯 우연히 다가온다. 공감능력이 낮다는 사실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하니 원하면 하루 날 잡아 만나서 공감능력을 학습시켜 주겠다고 말씀하신 고마운 분도 계셨지만, 어쩌면 내게 더 필요한 일은 여러 사람의 안경을 써 보며 그 우연에 노출될 가능성을 끊임없이 만들어 주기 아닐까. 더 넓은 지평으로 다가가는 길은 누군가의 지도보단 그 우연 속에 있을 테니.
많은 사람들은 내게 조언한다. 글쓰기 초보를 탈출하려면 뭐든지 일단 써 보라고. 자꾸 그래야 글쓰기 근육이 붙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건 쓰던 근육만 쓰는 것이니 반쪽짜리 조언밖에 되지 못한다고 내가 굳게 믿는 건 이런 이유에서이다.
세월호 참사가 있고 이날까지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그건 제 발로 놀러 나갔다가 저렇게 된 거 아니냐(혹은 '그러게 누가 그런 데 가래?')' 그다음으로 많이 들은 말은 '대체 언제까지들 저럴 거냐' 세 번째로 많이 들은 말은 '그래서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건데'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인지 몰라서 조심스럽지만, 놀러 가다 그랬으면 덜 슬픈 일이 되고 열심히 공부하러 가다 그랬으면 크게 슬퍼하기에 합당한 일이 되는 걸까. 무엇을 하러 어딜 가는 생명들인지를 가지고 그 보호가치에 가감이 생기는 건 어느 나라의 셈법일까. 이태원 핼러윈데이 참사 때도 그러던데, 그러게 그런 데는 왜 가느냐는 말이 거기서 왜 나올까.
유가족들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마음껏 슬퍼할 자유를 인정하는 일은 아닐까. 그들에게 이젠 그만 슬퍼하고 그만 괴로워하라고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지 않을까. '그 정도 했으면 이젠 그만하지'가 아니라 20년을, 30년을, 아니 평생을 마음껏 슬퍼해도 됨을 인정하는 일 아닐까.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슬픔이 세상에서 충분히 공감받지 못하기에 더욱 큰 목소리로 자신들의 슬픔을 외치고, 세월이 갈수록 더욱 커져가는 슬픔이 되어 그 모든 것들을 여전히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나 바랄 수 있다면, 사람의 감정은 어떤 경우에도 잘못될 수 없음이 전제되었으면 좋겠다. '이젠 그만하지 좀'이라는 말에는 '저들이 느끼는 저런 수준의 감정과 반응은 잘못되었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누군가가 얼마의 기간 동안 어느 강도로 반응하든, 그건 타인이 그 반응의 크기나 지속 시간의 잘잘못과 적정성 여부를 놓고 판정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부터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제삼자이니 그럴 수 있겠지만, 당사자에게 제삼자의 입장을 요구하는 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소설 읽기를 한가한 사람의 무익한 행위로 보는 시선이 있는 걸 안다. 우리 사회는 오히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분위기다. 하지만 지식을 구하는 목적의 실용적 독서 말고 이런 비생산적 독서로 얻을 수 있는 건 내겐 작지 않다. 실제로는 되어 볼 수 없는 게 되어 보는 것도, 혼자서는 가져 보지 못했던 각도의 시선을 가져 보는 것도 비생산적 읽기를 통해서니까.
그런 마음으로 읽는 책이 재미까지 있으면 뭘 더 바랄까. 하지만 재미없어서 하품만 나와도 좋다. 아예 책만 보면 잠이 퍼붓는다는 사람도 봤다. 부끄럽게 고백하자면 나도 거기에 가깝고, 실제로 책을 수면제 대용으로 쓸 때도 있다. 책만 보면 졸음이 쏟아진다고? 그건 좋은 일이다. 몸에 좋을 게 없는 수면제 대신 책만 읽어서 잠이 오면 그만큼 좋은 일이 어딨나.
조금만 덧붙인다면 이왕 책을 수면제 대용으로 쓰려거든 흔히들 하듯 가볍고 얇은 책보단 내 경험상 조금 두툼한 책이 낫다. 왜냐하면 읽다가 잠이 오면 베고 자기 좋기 때문이다. 여름날 시골집 툇마루에서 책을 읽다가 책을 베고 시원한 매미 소리를 자장가 삼아서 깜박 잠들었다 깨어났을 때의 행복감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재미가 있든 없든 책이 주는 행복감은 그렇게나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