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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Aug 10. 2023

지렁이 댄스

글쓰기를 하다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현자타임이 올 때가 있다.


예전에는 현자타임은 주로 쓰던 글을 이어 쓰려니 잘 안 될 때 생겼다. 작가의 서랍은 블랙홀과도 같아서 한번 서랍에 들어가면 나중에 끄집어내기가 어렵다. 꿈꾸는 거랑 비슷한데 가령 어느 날 엄청 야한 꿈을 꾸다가 화장실에 가고 싶어 눈을 뜨고 후다닥 화장실에 다녀와서 편안한 이불속으로 폴짝 다이빙하고 "헤헤, 어디까지 꾸었더라? :)" 백 날 이래도 그 꿈이 이어져서 꿔진 적은 실제로 한 번도 없는 것처럼(글쓰기와 꿈꾸기는 닮은 점이 참 많다).


그러니까 글 쓰다가 무슨 이유로든 생각이 한번 정지하면 나중에 그 생각을 이어나가기가 힘들고, 결국 똑같은 생각만 하다 덮기를 무한반복하며 제자리걸음만 한다. 서랍 속 글도 유효기간이 있다. 냉장고 안에서 오래되어 썩어 버린 반찬처럼. 야심 만만하게 시작했다가 마무리짓지 못한 채 나중에 꺼내 보면 이게 정말 내가 쓴 게 맞긴 한 건지도 모르겠고 "도대체 네놈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냐?" 이게 되는 거다.

되다 만 글이 나를 야단친다.

학습하는 배가본드는 그리하여 작가의 서랍은 불가피할 때만 사용하되, 서랍에 저장해도 일주일 내로 발행 못 하면 미련 없이 내버린다는 나름의 룰을 정했다. 좀 엉성하다 싶어도 일단 시작하면 멈추지 말고 웬만하면 끝까지 써 버리려 한다. 글의 완성도는 떨어졌지만 다행히도 이어 쓰다 안 써져서 오는 현타는 줄었다.




그런데 요즘은 신박한 현타가 날 괴롭힌다. 현가본드와 글가본드가 너무 차이 난다. 글가본드는 제법 멀쩡해 보이고 얼핏 보면 차분하게 말도 가려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정작 현가본드는 기습적으로 생각 없는 멍청한 행동을 일삼고, 기습적으로 마음에도 없는 헛소리를 남발해서 상처를 주기 일쑤며, 기습적으로 똘기 충만하며, 기습적으로 공감 능력 떨어지고, 기습적으로 성찰도 잘하지 못한다. 글가본드와 현가본드는 선순환으로 함께 성장하는 관계여야 할 텐데, 글가본드만 흠씬 발달하고(←'흠씬'의 바람직하지 못한 용례), 현가본드는 여전히 제자리다.


글 쓰다가 현타를 제일 세게 맞을 때가 이때다. 이럴 거면 글쓰기 뭐 하러 하나. 낑낑거리며 글 하나 삘삘 완성해 놓고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에 그 순간은 이 생각을 못하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예전 글을 다시 보고는 "넌 누구니?" 이게 되는 거다.

횅댕그렁 글만 있고 사람이 없는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내가 그런 글을 쓰고 있다. 내 글의 치명적인 문제다. 글 속에 사람이 없다. 춤추는 지렁이만 있다. 자모 수만큼의 지렁이가 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수천 마리 지렁이가 있다.


애초에 글쓰기를 하는 이유도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해서일 텐데 성장은 개뿔 온라인 괴물 한 마리 키우고 있는 주제에 다른 작가님들 따라가겠다고 며칠에 하나 목표 잡아서 부지런히 쓰고 또 쓰는 게 나를 위해 도움이 될까. 뭐가 뛰니 뭐도 뛸 게 아니라, 나의 경우가 이렇다면 오히려 늦춰야 맞지 않을까. 좋은 글을 쓰고 싶은 고민보단 글과 나를 동기화하려는 고민이 먼저 아닐까. 열 손가락으로 무수히 떠드는 얘기들을 실제 삶으로 살아 내지 못하면 그건 그냥 가짜다.


오늘도 지렁이는 춤춘다. 이 와중에도 춤춘다. 바람은 불고, 새는 날고, 지렁이는 춤춘다. 지렁아 춤춰라. 추고 추고 또 춰라. 지쳐서 아주 그냥 꽥 돌아가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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