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기꾼은 아니다. 그런데도 마스크를 벗는 게 힘들다. 겨우 3년 전만 해도 마스크 쓰는 게 그토록 싫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됐구나. 시간은 뭔가를 조용히 지워 버리기도 하고, 뭔가를 조용히 만들어 내기도 하며, 가끔은 익숙함과 낯섦을 뒤바꾸어 놓기도 한다.
미술관에 갔다. 전시회 테마는 가면무도회. 온갖 가면(mask) 속에서,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한껏 가면인 것들 속에서, 세상의 진실과 거짓을 사색한다.
가면은 이중적이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우리를 멀리 떨어지게 하는 동시에 그 한 겹 막 뒤에 숨음으로써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한다...
가면은 이미지다. 철저히 연출된 가짜이고, 그렇기에 그 뒤에 숨겨진 것은 언제나 궁금하다. 가리지 않았다면 정작 관심도 없었을 맨얼굴이지만 숨었기에 찾고 싶은 모습이다...
가면은 문화다. 관습과 편견으로 한껏 멋을 낸 커튼이다. 그러나 그 너머에는 여전히 벌거벗은 동물이 두 발로 서 있다. 먹이를 찾고, 교미를 하고, 새끼를 키우고, 포식자를 피해 숨는 놀란 눈의 원숭이가 있다. 털 없는 노란 원숭이가...
성능경은 여러 신문에 실린 다양한 얼굴들을 모아 근접촬영하고 눈에 노란색 띠를 붙였다. 당시 범죄보도에서 사람의 눈을 검은색 띠로 가리는 관행 때문에 검은 띠로 눈을 가리면 범죄자라는 의미가 덧칠된다. <특정인과 관련 없음>은 이렇게 사회적으로 무언합의된 판단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한다. 일률적으로 붙인 노란색 띠는 긍정적 의미인지 부정적 의미인지, 각각의 사진들이 실렸던 기사는 원래 무엇이었는지 다같이 모호해지게 만들어 버리는 가면이다.
발걸음을 옮긴다. 가면과 가면 사이로. 가면에서 다른 가면으로. 모든 것은 가면이다. 나도 가면이다. 처음엔 모든 게 가면이다가, '그럼 이것도 가면인가?'가 되고, '이건 어떻게 가면이 될까?'가 되고, '그럼 내 삶에서 어디가 가면이었나?'가 되고, '아니 아니, 내 삶에서 어디가 가면이 아니었나?'가 되고,
그리고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 물음에 떠오르는 답이 하나도 없었다.
어릴 때, 에세이는 '붓 가는 대로, 진솔하게 쓰는 글'이라고 배웠다. 그것 때문에 에세이가 가장 쓰기 쉽다고 생각했다. 붓 가는 대로 진솔하게 쓰는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내가 그동안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게 된 건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나는 진솔함이라는 걸 자신을 애써 포장하려 들지 않으면 얻어지는 상태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무지하게 애를 써야 만들어 낼 수 있는 상태였다. 순간 내가 너무 부끄럽고 창피한 거다. 내가 쓰는 글들이 진솔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그 문제가 아니라 내가 지금 진솔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상태라는 이 사실 자체가 치욕스러웠다. 사람이 오랫동안 '척'하면 실제로 그 모습이 되기도 한다는데, 어쩌면 나는 진솔해서 진솔하게 쓰는 게 아니라 진솔한 글을 장기간 끊임없이 써서 진짜로 진솔해지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요리연구가 백종원은 말한다. 방송하다가 힘든 집이 보이면 제작비 말고 자기 돈으로 고쳐주거나 뭔가를 사 주거나 할 때가 있는데 그건 그야말로 '척'이라고. 가슴에 손을 얹고 그건 '척'이라고. 방송에 그게 나가면 내가 되게 착한 사람처럼 보일 거니까. 내가 어려운 자영업자들을 진짜로 걱정하는 사람으로 보일 거니까.
백종원은 덧붙인다. 이 척이라는 게 참 묘한 매력이 있다고. 척을 해서 다들 기뻐하면 그 척을 더 하게 된다고. 거기서 성취감이, 쾌감이 느껴지면 그게 몸에 밴다고.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다. 잘난 척 같은 순전 자기만을 위한 그런 '척' 말고, 남의 글 슬쩍 베껴다 사유요정 코스프레 하는 이기적이기만 한 그런 '척' 말고, 타인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 이타성이 스며 있는 '척'은 더 큰 척으로 선순환된다.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거대한 행복과 내적 풍요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그래, 하긴. 소꿉친구 좋아하는 척하다가 진짜로 좋아해 버리는 사람도 있고, 스토커 퇴치를 위해 애인 없는 여자의 애인 행세를 하다가 진짜로 애인 된 사람도 있고, 슬픈 사람 앞에서 우는 척하다가 진짜로 슬퍼서 울고 있기도 하고, 공인이 이미지 관리하려고 기부하다 맛들여서 진짜 기부천사가 되어 버리기도 하는 판이니.
진솔하게 써라! 진솔하게 쓰라고! 귀가 따가울 정도다. 진솔하게 쓰는 거 분명 좋은 거긴 한데, 난 누구한테도 '진솔하게 쓰세요' 이런 말을 못 하겠다. 누군 진솔하기 싫어서 진솔하지 못할까. 엄청 어려워서 안될 뿐이지. 무의미하다. 선택적으로 힘을 뺄 수 있을 정도로 모든 힘을 쏟아 보지 않은 사람한테 힘 빼라는 말만큼이나.
오늘도 나는 진솔하려고 끙끙 앓는다. 척을 생활화하다가 척이 인생이 된 사람으로 남기 위해 어제도 오늘도 진솔한 척을 한다. 그런데 애초에 진솔하지 못한 놈이 진솔하게 쓰면 이건 진솔한 건지 아닌 건지 그건 잘 모르겠다. 낑낑 애써서 "앗! 진솔하다 진솔!" 이래 놓고는 얼마 안 가서 이 자체가 진솔하지 못하다고 느낀다. 이름하여 진솔한 글쓰기의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