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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Nov 08. 2023

그런 쓰잘데기 없는 건 왜 읽냐

직장의 내 자리에는 여러 권의 책이 있다. 대부분 그렇듯 업무 관련 필수 책자들이 몇 권, 저자에게 증정받은 에세이집, 그리고 약간의 시집이 있다. 어느날 직원들 일하는 모습을 시찰하시던 높은 분이 내 자리를 보고 이 말을 시전한다.


이런 쓰잘데기 없는 책들은 왜 보나?


근무 시간에 농땡이 피운 것도 아닌데 자리에 그런 걸 갖다 놓은 것만으로도 무슨 죄라도 지은 것 같아 슬그머니 치워야 했다. 보지도 않는 책들 가져와서 깔아 놔야 할 판이다. 업무편람과 법령집은 이미 꽂혀 있고 그렇다면 자기계발서, 위인전(넓게 보면 이것도 자기계발서에 속하니), 또 뭐가 있지? 부동산이나 재테크 가이드북도 괜찮겠구나. 이젠 볼 필요 없는 토익책도 하나 곁들여 주고. 어때, 안 어때?


시곗바늘을 돌려 보자. 오래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대학원 연구실의 자리에 전공 서적들만 빽빽히 있으니 질식할 것 같아 에세이책 몇 권 갖다 놓았다가 지도교수님으로부터 똑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건 아니었고 '나부랭이'라는 말이 하나 더 있었던 걸 빼곤.




"그런 건 읽어서 어디다 쓸 거냐?" 이건 읽기를 오로지 효용의 관점에서만 보는 견해이다. 그 견해에서는 (1) 책이 당장 뭔가에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을 담고 있고 (2) 읽는 사람에게 바로 그 지식을 구하는 명확한 목적이 있어야 의미 있는 독서로 판정된다.


그런 읽기를 중시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자주 하지 않을 뿐 실용적 읽기는 독서의 아주 중요한 기능이다. 그게 요즘 출판 시장의 트렌드이고 이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서에 그런 기능이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다만 남들에게 취존(취향 존중)만 부탁하고 싶을 뿐이다. 뭔가를 배워서 곧바로 실생활에 응용하지 못하는 읽기라고 송두리째 무가치한 독서라고 몰아세우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그런데, 진짜로 목적이 없는 독서는 쓸모도 없을까요.

목적성이 뚜렷한 읽기는 핀잔을 듣지 않는다. 어린이가 위인전을 읽고 있는데 "그럴 시간에 공부를 한 자 더 해"라고 말하는 부모는 없다. 학생이 수험서를 읽는데 "그깟 쓸모없는 건 읽어서 어디다 쓸 거냐?" 할 사람은 없다. 직장인이 재테크 가이드를 읽는데 "아까운 시간에 좀 생산적인 걸 해야 하지 않느냐" 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독서는 바로 그 쓸모없는 읽기이고, 핀잔을 듣기도 쉬운 그 읽기다. 거기엔 어떤 목적성도 없다. 그냥 읽을 뿐이다. 시와 소설만큼 상상력과 공감능력을 키워 주는 것도 드물지만 시나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그 능력을 갖추려는 목적으로 시를 읽고 소설을 읽진 않는다. '목적 없는 읽기'가 곧 '쓸모없는 읽기'는 아닌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둘을 혼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소설을 읽다가도 "그런 건 뭐 하러 읽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소설을 읽어서 얻을 수 있는 건 재미, 기껏해야 상상력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소설을 많이 읽어 보진 않았지만 현실의 내가 될 수 없는 온갖 것들이 되어 보니 어느 순간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삶이란 없다는 의외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상상력을 발휘해 타인의 삶에 공감할 수 없다면 진정한 인간 존재로서 서로 관계를 맺는 데에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 나처럼 공감능력이 낮은 사람에게는 더욱 필요한 게 바로 그런 읽기일 것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읽기'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을까. 특정 목적을 가지고 읽기를 한 사람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읽기를 많이 한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나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마음이 더 깊고 넓은 걸 나는 수없이 보아 왔다. 단지 효과가 더디게 나타나서 잘 모를 뿐 그걸로 얻는 효과는 막대하다. 목적성을 가진 읽기는 그 목적 하나밖에 얻지 못하지만 목적 없는 읽기로 얻을 수 있는 건 무궁무진하다.


세상을 보는 눈.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 둘 다 내가 갖지 못한 거지만 별로 쓸모없는 일이다. 돈이 되는 일도 아니니까. 다만 당장 돈 되는 것 말고는 모두 무가치하게 여기지는 않고 싶을 뿐이다. 오히려 사람을 결국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세상에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이 '쓸모없는 읽기'에 역설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쓸모없는 읽기야말로 사실은 가장 쓸모 많은 읽기라는 역설이.


깊게 생각하지 못해 울림 있는 글을 쓰지 못한다. 세상을 보는 맑은 눈이 없어 시를 쓰지 못한다. 그저 창문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닫혀 있지 않게만 해 두고 싶다. 다른 이들의 글과 생각이 언제든 바람처럼 다가올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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