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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Jan 17. 2024

그날 이후 시를 쓰지 않았다

내가 아주 하기 싫어하는 얘기. 어릴 적 어느 동시 대회에 입상했던 적이 있다. 이 일로 시 쓰기에 재미를 붙이면서 그 후 한동안 연습장에 시 같은 것을 끼적이곤 했다. 다른 사람의 시를 읽고 마음속에서 꼼틀거리는 게 느껴지면 베껴 쓰기도 하고(그걸 필사라 한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시를 쓰고 있었다.


얼마 안 가서 시에 흥미를 잃었다. 뭔가를 썼을 때 동시다운(?) 분위기가 아니면 어김없이 지적이 들어왔다. 시가 반드시 밝고 명랑하고 화사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른들에게는 어린이니까 동시답게 써야 한다는 묵계라도 있는지 "아니, 이렇게 쓰지 말고..." 거의 이런 피드백이 돌아왔다. 어른들은 나의 시에 관심 있는 게 아니라 그걸로 타는 상에만 관심이 있는 거로구나. 그걸 안 순간부터 시가 쓰기 싫어졌다.


이사를 가던 날, 폐지 더미 앞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다. 예전 동시 대회에서 받은 상장을 폐지 더미에 슬쩍 끼워 넣었다. 하루종일 장맛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쓰는 건 흥미를 잃었어도 읽는 건 여전히 좋았다. 누군가의 아름다운 구절을 만나면 한여름날 스프링클러로 시원한 물을 뿌려주는 느낌이었다. 그게 그렇게나 좋았다. 국어 시험에서는 인용문에서 처음 보는 시에 홀딱 반해선 내가 지금 시험을 보는 중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헤롱헤롱거리다 시간 왕창 날려 먹고 시험 전체를 시원하게 말아 드시는 게 일이었다. 서점 가면 가장 먼저 시집 코너로 발길이 향하는 행동, 지하철역 승강장의 스크린도어에 있는 시민공모작 앞에서 나도 모르게 우두커니 한참 서 있는 등의 행동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들킬 때마다 "남자가 안 어울리게 그게 뭐냐"라는 핀잔이 돌아오는 경험을 여러 번 하자 많은 사람들 기준에서 여자가 시를 좋아하는 거랑 남자가 시를 좋아하는 건 같은 게 아님을 알게 되었고, 내 이런 특징은 되도록 남들이 모르는 게 나은 뭔가가 되어 버렸다.


어른들은 내가 쓰는 시가 아니라 상에만 관심 있다는 게 1차 깨달음이었다면, 사람들은 시를 좋아하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2차 깨달음이었다.

이후로는 누가 보는 데서 시를 읽는 것은 물론, 그런 표현이 나도 모르게 나오는 것도 주의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하는 실수(?)까지 완전히 없애긴 어려웠다. 겨울이 봄보다 따뜻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고 하니 기상청 월별 평균기온을 찾아 보여주며 반박하는 사람이 있었고,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라 하니 속도는 속력과 방향을 합친 벡터값이니 그 말은 논리적으로 틀리고 속력으로 고쳐야 한다고 반박하던 사람이 있었다. 가끔은 "어우, 감성충!(오글충일 때도 있음)"이라는 말이 덤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고상해 보이려고 척하는 거 아니냐'라는 말이라도 들으면 거의 나노미터 단위로 쪼그라들었다.


척한다는 오해를 받기 싫어서 척을 해야만 하는 신세라니. 어이없게도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입증하며 살기 위해 과학 잡지나 실용 도서를 더 좋아하는 척을 해야 했다. 오랫동안 열심히 척을 하면 나중에는 진짜 그렇게 된다는데 이날까지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있다. 내 노력이 부족했던 걸까.


브런치 밖에서는 내 이런 모습을 드러내기 겸연쩍다. 시대에 뒤떨어진 감성충으로 보이고 싶지 않으니까. 어릴 때 이후로 내 손으로 쓰지는 않지만 남들이 쓴 시를 읽기는 좋아한다는 사실을 실토하는 일도 내겐 쉽지 않다. 남들 눈치를 보지 않고 브런치 바깥 어디를 가서도 읽고 싶은 글을 마음껏 읽고 쓰고 싶은 글을 마음껏 쓰면서 "감성충이면 좀 어떻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타인의 감정에 지금보다는 관대해져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오글거린다는, 감성충이라는 한마디로 한 사람의 감각과 감정을 퇴치하고 박멸해야 할 뭔가로 만들지 않는. 어딘가의 누군가가 늦은 밤 새벽 감성이라며 넌지시 힘듦을 토해내거나, 지쳐서 누군가 손을 잡아 주길 바랄 때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에게 따스한 시선을 건넬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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