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글을 하나 썼어요. 생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익어가는 망고를 보며 어쩌면 우리는 어른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어른이 되어 가는 중인 건 아닐까 하는 글이었죠.
완결되는 삶이란 없고 다만 완성을 향해 가는 길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었어요. 이게 엉터리 생각일지라도 그렇게 생각하면 섣불리 말하고 섣불리 타인을 단정하진 않을 테니 최소한 저에게만이라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고, 그러길 바랐죠.
저의 필명은 배가본드(Vagabond, 방랑자)예요. 그런데 저뿐 아니라 누구나 잠깐 다녀가는 방랑자 아닐까요. 몇 살까지 살더라도 그 삶은 그리다 만 그림이 될 걸 알아요. 하루하루 완성을 향해 가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부족한 상태일 것을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평생 도달할 수 없는 완성의 상태로 뛰어가기 때문에 미완성은 그만큼 아름다워지는 거겠죠.
누군가의 눈앞 5cm에서 사랑한다고 말해 본 적 있나요? 음, 무지 힘들지 않던가요. 사랑해요라고 말하거나 쓰는 게 힘든 건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마음이 사랑한다는 그 말보다 훨씬 커서죠.
그런 말이 있어요. 무슨 말을 해도 마음보다 작게 나갈 수밖에 없는 말. 그 차이가 괴로워서 우린 차라리 '아무 말 없음'을 택하기도 하죠. 그러다 있는 힘을 다해서 일단 그 말을 하면, 말로 나가지 못한 건 물로 나가요. 맘과 말의 딱 그 차이만큼.
시인이라면 사랑 대신 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말로 표현하려 하겠죠. 외로움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외로움을 말하는 게 시니까. 맘과 말의 차이를 줄이려고 몸부림치는 게 시인이니까. 그렇지만 시인이라고 맘과 말의 차이가 없을까요. 어떤 말은 어떻게 표현해도 맘과 차이가 없을 수가 없어요. 그나마 '이거'라도 좋다면 그 차이가 조금이나마 줄어들진 모르겠지만 저는 그조차 못 되니 환장할 노릇이죠. '이거'란 뭐냐고요? 뭐긴 뭐예요, 이거죠.
'표현의 역설' 정도로 부를 수 있을까요? 우린 뭔가를 말하는 순간 우리가 느끼는 감정만큼 표현하지 못해요.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거죠. 사랑한다는 말은 태생적으로 미완성이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그걸 말하고 표현해야 하는 건, 어떻게 표현해도 미완성일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 표현할까 늘 고민해야 하는 건, 그렇게라도 표현하면 할수록 그 마음은 더욱 깊어지기 때문이죠.
매일 글을 써요. 브런치 발행을 매일 하지 않을 뿐 날마다 뭔가 끼적대긴 해요. 필사일 때도 있고, 나중에 글이 될지도 모르는 생각 붙잡기일 때도 있고, 브런치나 블로그에 실제 올리는 글일 때도 있고, 아예 한 사람에게만 보여줄 글일 때도 있어요. 보통은 하루나 이틀에 하나 정도지만 삶 전체가 통째로 하나의 큰 글이라면 그건 평생 써도 결국 완성되지 못한 글이죠.
누군가 물었어요. 당신 글에는 왜 댓글이 많냐고(많다기보다는 적은 구독자 수 치고는 많다는 뜻일 거예요). 그건 글에 빈 곳이 많아서죠. 실제로 제 글은 완성도가 떨어져요. 이건 저의 고질병인데 늘 어딘가 비어 있고, 뭔가 모자라고, 뭔가 문제를 제기하긴 하는 듯한데 무엇에도 명쾌하게 답을 내리질 못해요. 늘 그런 식이죠.
그런데 억지스러운 자기 위안일지도 모르지만, 브런치 글은 함께 쓰고 완성해 간다고 생각해요. 빈 곳은 어차피 읽는 분들께서 메꿔 주시니까요. 저의 생각의 끝점이 그분들 생각의 출발점이 되는 건데 그걸로 족해요. 그 이상은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삶 전체를 큰 글로 보아도 쓰다 만 글이듯, 그 안의 작은 글 하나하나를 봐도 모두 쓰다 만 글이에요. 하지만 글 읽는 분들 중에 저만큼도 안 똑똑한 분은 없고 그 상태에선 무슨 글을 어떻게 써도 어차피 미완성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전화위복이랄까, 그렇게 생각하니깐 글의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발행하는 건 한결 쉬워지니 그것도 나쁘지 않던데요.
모든 것은 어차피 미완성이니 너무 애쓸 필요 없다고 결론짓는다면 제 생각하곤 달라요. 한 오래된 노래처럼, 삶은 쓰다가 만 편지, 부르다 만 노래, 그리다 만 그림, 새기다 만 조각이죠. 마지막까지 미완성에 머무르고 그렇게 될 걸 뻔히 알아도, 그래도--아니, 그렇기 때문에--곱게 쓰고, 부르고, 그리고, 새기길 원해요. 완성보다 더 아름다운 건 미완성인 상태에서 완성을 향해 뛰어가는 길 위에 있으니까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미완성의 역설이고, 미완성의 아름다움이에요. 갑자기 미완성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그것마저 헛갈리지만 제가 할 일은 그걸 따져 구별하는 것보다는 완성이라는 게 존재하는 영역이 실제로는 매우 드물다는 걸 아는 일, 대부분의 영역에선 뭘 해도 어차피 미완성이 됨을 알고 받아들이는 일 정도겠죠.
그러니 다들 함께 힘내기로 해요.
오늘도 우리는 아름다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