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내 과거 글은 왜 맘에 들지 않을까
글벗님 한 분께서 '나는 세상에서 내 글이 제일 재밌다'라고 글을 쓰신 적이 있다.
아 참, 나도 그렇지. 오늘도 무슨 재밌는 글이 있나 브런치에 접속했다가 내가 왜 브런치에 들어왔는지 까맣게 잊곤 내 글들만 죽어라 보며 킥킥대다 피드에 뜬 글벗님들 글은 하나도 못 읽었다. 어째 상태가 살짝 불량해지네. 아니, 그러고 보니 나는 올초에도, 작년 봄에도 이랬네. 브런치 처음 시작할 때부터 나는 줄곧 이런 식이었으니 상태가 불량해진 게 아니라 원래 그랬었군.
https://brunch.co.kr/@neurogrim/54
그 글을 처음 봤을 때 '맞아! 맞아! 나도 그래!' 하고 폭풍 공감을 하면서도 당시 나는 브런치 시작 두 달도 채 안 되어 작품 하나 발행하기에 급급한 상태라 그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엄두를 못 냈는데, 이젠 알 것 같다. 그분이나 내가 특이한 게 아니라 그건 글 쓰는 사람에게 당연한 일이란 걸.
Writers are really people who write books not because they are poor, but because they are dissatisfied with the books which they could buy but do not like.
지금 나의 작가 프로필 소개문은 <저는 써야만 하는 사람이에요. 돌아서면 잊어버리니까요>인데, 마지막 순간까지 경쟁하다 한 끗 차로 자리를 내 준 문장이 있다. 그게 위의 인용문이다. 독일 작가 Walter Benjamin의 말로, '작가는 가난해서가 아니라 살 수 있지만 맘에 들어하지 않는 책들에 대한 불만 때문에 책을 쓰는 사람들이다' 정도의 뜻이다.
작가는 어떻게 탄생할까? Walter Benjamin의 문장이 답을 갖고 있다. 날 때부터 작가인 사람은 없고 누구나 처음에는 독자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정말 읽고 싶은 글이 있는데 다른 누군가가 이미 그걸 써 놨다면 그 사람은 일단 그 글을 읽을 것이다. 그러면 또 다른 글이 읽고 싶어진다. 이 과정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기가 진짜 읽고 싶은 글이 있는데 그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 A Writer Is Born -
작가는 그렇게 태어난다. 작가는 자기가 정말 읽고 싶은 글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그때 글을 쓴다. 결국 작가가 쓰는 글은 사실은 자기가 가장 읽고 싶던 바로 그 글이다. 그게 이미 존재한다면 그냥 읽고 끝났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그 글을 쓰는 것이고, 세상에서 자기 글이 제일 재밌다고 느끼는 건 그 작가의 자기애 문제가 아니라 그냥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가도 가끔 다른 사람의 훌륭한 글을 보면 감탄과 함께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건 별개의 문제이다.
독자 입장에서 단일한 글에 대한 애정에도 수명이 있는 걸까. 작년 가을에 읽은 책 딱 하나 말고는(그 책은 지금도 내가 가장 자주 펼쳐드는 책이다), 정말 좋아하는 책이 있어 꼭 끌어안고 살다가도 계절이 바뀌면 그 자리는 보통 다른 책이 차지하고 있다.
전에 썼던 글을 다시 본다. 세상에나 마상에나, 이것도 글이냐. 그때는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보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후장은 답답하고 팔다리는 불판 위에 올려놓은 낙지처럼 트위스트를 추며 쪼그라들어 소멸할 지경이다. 아이고, 발가락으로 써도 이거보단 낫겠다.
그런데 어쩌면 이건 그 글이 진짜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독자로서 글 애정하기의 수명 때문은 아닐까. 현재의 내 눈으로 보면 예전의 글들은 촌빨 날리고 영 별로지만 그렇다고 다른 분들이 나의 과거 글을 보고 '뭐야, 구리잖아' 이럴 것 같지는 않다. 지금 나의 과거 글을 보시는 분들은 애정 수명이 지난 현재의 나와는 다른 시선으로 볼 테니까. 내 과거 글이 별로인 건 나 자신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걸 테니까.
좋은 글을 읽고 싶은 독자로서의 욕망,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작가로서의 욕망. 글쓰기에 동시에 존재하는 두 욕망의 이 기묘한 이중성 때문에 내 글이 제일 재밌고, 내 과거 글이 너무 싫고. 그렇게 일정 기간을 사이에 두고 오늘도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그러니까 이젠 부정적 자기 객관화 신공으로 나 자신 이상한 놈으로 몰아가지 않는 걸로. 당장 지금 삘삘 써서 발행버튼 누르려고 폼 잡고 앉았는 이 글도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서 발행 후에도 몇 번이나 읽고 또 읽고 있다가 얼마 지나서 대체 이게 뭐란 말이냐 할 게 뻔하지만 그 자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걸로. 그건 글쓰기 욕망의 이중성에 따른 당연한 결과니깐.
언젠가 처음 브런치 작가가 되었을 그때, 누군가가 브런치 작가가 뭔가 대단한 건 줄 알고는 무슨 글을 써야 하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무슨 글을 써야 하는지는 그 사람이 읽고 싶은 글이 뭐냐에 따라 정해질 텐데 그가 제일 읽고 싶은 글이 어떤 글인지 나는 죽었다 깨나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답 대신 싫은 소리 좀 했다. "에라이, 너는 내가 사귀라는 여자랑 사귀고 내가 결혼하라는 여자랑 결혼할 작정이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