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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Oct 21. 2022

아무 데서나 시를 쓰면 안되는 이유

10년쯤 전.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려고 한동안 필리핀의 휴양지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해마다 7~10월, 우기가 되면 내리는 비는 참 낭만적이다.


어서 내게로 오라며 비가 나를 잡아끄는 듯했다. 비가 내리면 나가서 일부러 우산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나 자신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수한 감정의 조각들이 차가운 빗방울 하나하나랑 만나면서 아이스크림에 박혀있는 톡톡이 사탕처럼 한꺼번에 깨어났다.


톡.

톡톡.

톡톡톡.

톡톡톡톡.

톡톡톡톡톡.



일부러 빗물이 고인 곳을 골라 걸었다. 거울에 담긴 하늘을 보며,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맞이하며, 그렇게 걸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시했던 아픔들, 그 순간 하던 일을 멈추고 응당 쓰다듬고 보살펴야 했을 감정들, 하지만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때마다 외면하고 묻어왔던 감정들이 모두 함께 고개를 들었다. 이 상황에서만 깨어나는 감정들이 있다. 그걸 꺼내려고 일부러 고독 속에 침잠했다. 눈물이 나오려고 하면 온몸에 힘을 빼 버렸다. 어차피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는 걸.


톡. 또 하나가 터졌다. 지친다는 건 하는 일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구나. 내 속도로 할 수 없을 때, 남이 정해 놓은 것에 질질 끌려가기만 할 때, 나의 삶에 주어가 없고 동사만 존재할 때. 번아웃은 그때 오는 거구나. 심지어 백수도 번아웃이 올 수 있겠구나. 지친 사람에게 '일을 줄여 줄까?' 이건 답이 아니겠구나. 나 자신에게도 가장 해선 안될 말이 '뭘 했다고?'구나.


톡. 커다란 바나나 잎에 굵은 빗방울이 부딪치는 소리는 하루 종일 들어도 좋다(그러고 보니 자연물과 자연물이 부딪칠 때는 항상 청아한 소리가 나는데, 사람과 사람만이 그렇지가 않네). 그렇게 온몸으로 비를 받아내며 마음껏 젖는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들이 조용히 제자리를 찾아갈 때면 나의 발걸음도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나를 위한, 나만을 위한 길

빗속은 내 마음이 쉬는 곳이었다.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걷는 행동은 나에겐 하나의 의식이었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나까지도 속이고 외면하면서 켜켜이 쌓아 두었던 마음속 감정들을 뒤늦게 불러내어 만나는 나만의 푸닥거리였다.


그곳을 떠난 뒤론 그런 행동을 하지 않지만, 여전히 나는 비를 원한다. 최고의 맑음은 흐림 속에 있음을 안다. 세월이 지나, 그 비를 또 맞을 때가 되었다. 조만간 다시 간다. 아무 말 없이. 혹시 누군가가 어디 가느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준비되어 있다.


목욕하러요.




"이놈아, 마지막으로 목욕 언제 했어?"

"(먼산을 보며) 아... 마지막으로 비가 온 게 언제지...?"


몇 년 전. 목욕을 언제 했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이러고 말았다. 그런데 잠깐만. 나 지금 시를 쓴 건가? 시는 쓰는 게 아니고 나오는 거라던데, 이게 말로만 듣던 그것인가? 신은 나 같은 놈의 마음속에도 시를 숨겨 두었는가? 오! 오!! 오!!! 나에게 이런 면이 있다니, 어때 안 어때? 고개를 돌려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이건 뭐 완전히 벌레 씹은 표정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한동안은 목욕했느냐는 물음을 받을 때의 대화의 흐름이 조금 바뀌었다.


"어제 씻었어?"

"네"

"물에?"

"물에 씻지 그럼 모래에 씻나용?"

"......"


도대체 이런 실없는 질문을 왜 할까 싶었는데 세월이 한참 지나고 그 경위와 맥락을 생각하니 어머니는 그때 충분히 그럴 만했구나 싶다(그런데 "물에 씻지 그럼 모래에 씻니?" 혹시 이것도 시는 아닐까?).


이거 아무래도 안되겠다. 일상 모드와 시인 모드는 섞지 않는 걸로. 시인은 직업이 아니라 상태라는 말도 있지만 이같은 나의 모습은 그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시를 남발하는 '증상'일뿐이다. 칸막이가 없어 형편없이 뒤섞여 버린 도시락 반찬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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