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잠깐, 친구를 따라 교회에 다녔던 적이 있다. 잠깐밖에 다니지 못했던 건 몇 가지 궁금함을 풀지 못해서였다. 그중 가장 궁금했던 건 이 세 가지였다.
(1) 아마도 내가 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이겠지만, 누군가가 열매를 따먹음으로 인해 그 후손인 모든 인간들에게 원죄가 있다는 건 우리가 죄를 빌어야만 하는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죄를 빌도록 강요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지옥에선 왜 나쁜 놈들인 악마들이 자기 편인 나쁜 놈들에게 벌을 주는 것일까?
(3) 천국에선 천사의 노랫소리와 온갖 산해진미가 가득하고 좋은 것들만 있다는데 진짜 그런 거면 매일이 지겹지 않을까? 방학을 하고 늘어지게 놀고 먹으니 열흘도 못 가서 따분하던데.
어쩐지 물었다간 큰일 날 것 같아서 감히 묻지 못하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고, '의문하지 말고 믿어라'라는 답을 받았다. 의문하지 않는 것도 할 수 있고, 믿는 것도 할 수 있는데, 그 둘을 동시에 하는 건 내겐 너무 어려운 일이었고 결국 해내지 못했다.
그 뒤로는 (1)과 (2)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3)은 아직도 궁금하다. 천국이 정말 그런 곳이면 거기 사람들은 정말 행복할까. 난 천국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조심스럽게 이렇게는 말해 보고 싶다. 천국의 실제 모습은 우리의 상상이 만들어 낸 그 모습과는 어쩌면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고.
현재의 직업을 가진 건 2017년이다. 그때 동기들은 연수 마치고 발령 나기까지 저마다 해외여행을 떠났는데 나는 전체 동기들 중 가장 먼저 발령이 났다. 4주 연수가 끝나자마자 설 연휴, 그리고 다음날 발령.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대가로 치르고 뭔가를 얻어낸 기쁨을 천천히 느껴 보기는커녕 다른 동기들 다 떠나는 여행도 나만 못 갔다. 나만.
그 아쉬움을 달랜 게 2019년에 뒤늦게 떠난 동유럽 여행이다. 본 것들 다 예뻤고, 먹은 것들 다 좋았다. 하지만 그 열흘의 행복감은 그다음 날 출근하면서 싸늘하게 식었다. 눈을 뜨자마자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으악 비명을 질렀다. 직장에서 내 이름 부르는 소리, 자리 전화소리는 그야말로 소음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이후 한동안 모든 게 시시하게 느껴졌다. 여행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였다. 그때 나는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도파민만 찾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째지게 행복한 기분이 오래갔던 적이 없었다. 흔히 행복이라 말하는 환희, 성취 같은 건 호르몬으로 신경이 흥분하는 상태다. 그런데 사람 몸이 이런 상태를 오래 견디기는 힘들다. 어떤 이유로든 몇 달, 몇 년 동안 가슴이 설레고 신경이 흥분되는 상태면 심장이 배겨 날까? 얼마 못 가서 빵 터져 죽지 않을까?
도파민이 행복의 이유가 되니, 도파민 없는 시간은 행복하지 않게 느껴졌다. 다행히도 신은 나처럼 어리석은 놈을 위해 보호장치를 만들어 놓으신 것 같다. 비록 배움이 없어서 경제학에선 한계효용의 법칙이라 하고 심리학에선 쾌락 적응이라 부르는 그것까지 알지는 못하지만, 암만 좋은 일도 금방 익숙해지고 심드렁해지는 거, 맛있는 음식도 매일 먹으면 질리는 거, 오랜 노력으로 뭔가를 얻어낸 벅찬 기분도 일주일을 채 가지 못한다는 사실은 나 자신의 기억으로 알고 있다. 심지어 로또에 당첨된 기쁨도 이전의 행복 수준으로 되돌아가는 데 한 달도 걸리지 않는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는, 겪어 보지도 못한 일에 공감이 갔다.
이럴 때 세상은 말한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고. 하지만 그건 사람이 도파민에 절여져 심장 터져 비명횡사하지 않고 제 명대로 살 수 있게 보호하려고 신이 인간을 기막히고 바람직하게 만들어 놓은 건 아닐까.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행복하고 싶다는 소망이 행복해야 한다는 경직된 사명감으로 다가오고, 기필코 행복하자는 결심과 '나 지금 행복한가' 하는 성찰이 현재를 하루빨리 탈출해야 하는 상태쯤으로 인식하는 이상한 강박을 낳지 않기를, 행복은 추구하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것임을 내가 잊어버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가슴 설레고 환희에 넘치는 날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나 자신을 불행하다 생각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오히려 그런 날이 끊임없이 계속된다면 빨리 병원에 가야 된다. 행복을 영원히 지속되어야 할 특정한 상태라고 보는 사람이 살면서 '나는 행복합니다' 하고 생각할 리 없으니, 애초에 불가능한 상태를 갈망하며 나는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리라. '나, 지금 행복한가?' 하고 묻지도 않으리라. 나는 아무 생각이 없는 놈이다.
천국이 실제로 어릴 때 교회에서 듣던 그런 모습이 맞다면, 어쩌면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지금 우리 사는 세상을 꿈꾸진 않을까. 어쩌면 우린 오래전에 어디선가 살다가 모두 죽었고 지금 천국에 모여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나의 삶은 누군가의 꿈은 아닐까. 아니, 그냥 나 자체가 누군가의 꿈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누군가가 꿈에서 깨어날 때가 내가 사라지는 순간은 아닐까. 엉뚱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가끔은 우습게도 이게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되어 주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삶은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행복의 순간들을 가지고 전체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누구도 매 순간 행복할 수는 없다면, 행복에도 총량 보존의 법칙이 있다면, 삶은 건빵에 들어 있는 약간의 별사탕을 가지고 무미한 건빵 한 봉지를 먹어 내는 일에 가깝진 않을까. 그렇다고 별사탕만 있다면 아예 건빵 자체가 아닐 테지. 아니 그보다 되게 맛없겠지.
10년쯤 전으로 기억한다. 중국에서 어떤 선생님이 던진 사직서, 그 사유가 '세상이 그렇게나 넓다는데, 제가 한번 가 보지요.' 그 한 줄의 문장이 가슴을 뜨겁게 만든 날이 있었다. 지금의 나는, 그날 내가 뜨거웠던 곳의 대척점 근처의 어디쯤에서 말하고 싶다.
세상아, 나는 이만 내 집으로 돌아갈게.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언제 물어도 내 대답은 '지금'이다. 실제로도 지금이 가장 행복하지만, 언제나 나는 앞으로 올 날들이 지난날들보다 나을 거라고 믿으니까. 뭔가를 의문하지 말고 믿어야 할 때가 진짜로 존재한다면, 이럴 때는 아닐까.
휴대폰 화면 대신 내 작은 방 창문으로 세상을 내다보고 싶다. 인기 연예인의 근황 대신 연인의 아침식사에 관심을 가지고 싶다. 주소가 'http://www.' 대신 무슨 도(道)로 시작하는 작은 도시에서, 화면 대신 사람의 얼굴을 보며 조그맣게 살고 싶다. 그렇게 행복을 조금씩 되찾아 가고 싶다. 훗날 다른 세상 누군가가 꿈에서 깨어날 때,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고. 내 인생 이 정도면 괜찮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