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나게 훈훈했던 그 해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어이 거기, 내일 구미에서 하는 회의 말이야, 나 집에 일이 좀 있으니깐 네가 좀 가라."
그날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그때 회사의 사업장은 서울/평택/구미/창원에 있었고, 부사장님이 12월 27일부터 연말까지 갑자기 휴가라서 연내로 신년 사업계획을 보고하려면 26일뿐이었다. 그러자면 25일(성탄절)에 중간지점인 구미에서 사업장 관계자들과 실무 협의를 하고 곧바로 서울로 돌아와 26일까지 사장단 보고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 24일, 사무실 이전으로 하루 종일 대공사가 있었다. 언제 누가 마지막으로 입었는지도 모를 작업복은 창고에서 썩어가며 옷인지 걸레인지도 모르겠고, 온통 횟가루와 먼지를 뒤집어쓰고, 얼굴은 야전 훈련하는 군인처럼 시커멓게 검댕을 칠한 채 헐레벌떡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내 꼴은 완벽한 피란민이었다. 하지만 갈아입을 옷을 가져가니까, 도착해서 어디든 숙박시설만 들어가면 되는 거였다.
자정 넘어 구미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딜 가도 빈 방이 없다. 아.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구나.
눈과 비가 섞여 추적추적 내린다. 횟가루와 먼지 위에 눈비가 층층이 쌓인다. 내 양손엔 인쇄물로 빵빵하게 가득 찬 쇼핑백이 들려 있다. 그걸 들고 삘삘 돌아다니자니 손가락이 얼어서 끊어지는 것 같고, 쇼핑백은 젖어서 터질 것 같다. 답이 없다. 역으로 돌아왔다. 의자에 누워 신문지를 덮고 잤다. 처음 알았다. 신문지를 덮으면 이렇게 따뜻하구나.
그런데 누군가가 자고 있는 나한테 다가와 욕설을 퍼붓는다. 잠에 취해서 알아듣진 못했지만 왜 내 구역에서 자냐는 말 같았다. 누워 있는 나에게 정체불명의 뭔가를 확 뿌린다. 냄새가 고약했고 약간 찝찔한 느낌이었다. 여러 가지가 섞인 혼합물로 추정되는데 라면 국물이라고 굳게 믿기로 했다. 우리가 모르는 그들만의 생태계가 있고, 누가 자기 영역을 침범하면 잔인하게 응징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이때가 새벽 4시쯤. 춥고+졸리고+배고프다. 전날 사무실 이전으로 온종일 중노동하고는 거지꼴로 막차 타고 오며 저녁 먹을 시간이 있었을 리 없다. 무거운 짐을 들고 다리를 질질 끌며 천천히 걸었다. '야식 아침식사 환영'이라고 입구에 입간판을 세워 놓은 기사식당 하나가 문을 열고 있었다.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자리에 앉았다. 누군가가 고개를 빼꼼 내밀다가 도로 들어가 버린다. 다시 조용하다. 나는 말했다. "순댓국 주세요~"
순댓국이 나왔다. 순대가 하나도 없다. 에잉 뭐, 붕어빵에도 붕어는 없지. 만약 이 집이 설렁탕이라도 팔았다면 아마도 소가 장화를 신고 풍덩 밟고 지나갔다는 전설의 그 황우도강탕(黃牛渡江湯) 아니었을까? 황우도강탕 군대에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그런데 아무래도 이거 뭔가 이상하다. 퀘퀘하고 어딘가 시큼한 이 냄새는 뭐지? 순댓국이라기보다는 잔반 수거통 음식물 쓰레기에 더 가깝다.
아니 이거, 이 집이 원래 음식을 이상하게 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들이 나를 진짜 거지로 생각한 거구나. 순댓국이고 나발이고 빨리 여기서 튀어 나가라고 나의 내면에서 뭔가가 버럭버럭 소리쳤다. 도망치듯 나왔다. 옷이라도 좀 갈아입고 갔다면 달랐겠지만, 그 전날 내내 먼지+페인트+횟가루, 밤새 눈+비+정체불명 물질을 차례로 뒤집어 쓰고는 목욕도 못한 채 옷만 갈아입을 수도 없었다.
서울로 돌아온 다음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원래 나 말고 갔어야 할 C과장 말이 걸작이다. "어이, 힐링 잘하고 왔나? 거기 눈도 왔다며? 크리스마스에 사무실 이사한다고 고생하고 있는 걸 내가 보다 못해서 멀리 가서 힐링하고 오라고 보낸 거야. 가끔은 그렇게 멀리 가서 콧바람 넣는 주는 것도 정신 건강에 아주 좋지, 그렇지 않은가? 내가 다 너를 위해서 그렇게 한 거야."
C과장은 모든 직원을 '어이'라고 불렀다. 그는 '효율'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일은 그의 손을 거치면 양이 제곱 배로 팽창한다. 나중에 든 생각인데 그가 말하는 효율이란 우리가 흔히들 떠올리는 그런 스마트워킹이 아니라 말 짧게 하기 아니었을까? 그토록 효율에 눈이 먼 C과장이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건 처음 봤다.
누가 나를 위하고 생각하는 그걸 싫어할 이가 있을까? 그런데도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이걸 좋아할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동물적 감각으로 이게 나를 위하는 마음이 아님을 알아채기 때문이고, 나의 식물적 감각으로는 '너를 위하는 마음'이라는 게 말로 해서 그렇거나 아니거나가 되는 그런 성격의 것부터가 아니다.
"이게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듣는 사람보다는 말하는 사람 자신을 위해서인데도 무슨 숭고한 뜻을 가지고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슬쩍 바꿔 버리고는, 싫다는 상대의 마음에 억지로 쑤셔 넣어 버린다.
그런데 가장 더러운 포인트는 따로 있다. 이 말에는 듣는 사람이 그게 나를 위한 건지 너를 위한 건지도 분간하지 못한다고 보는 생각이 깔려 있다. 다시 말해서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라는 말의 뒷면에는 상대방의 지적 수준이 자기에 비해 현격하게 낮다고 여기는 마음이 아주 공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같은 말이라도 사람에 따라 '너를 위한 마음'이 얼마나 들어가 있는지는 조금씩 다를 수 있다. 누군 20%일 수도, 누군 40%일 수도, C과장처럼 아예 제로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설령 그게 100% '오로지 널 위하는 마음'이라도, 널 위하는 그 마음이 '너'보다 크게 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널 위한 마음이 너에게 도달해서 무엇이 될지 모르는 채 '너에게 내가 지금 뭔가를 열심히 주고 있음' 그 하나만 남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 나는? 나는 누군가에게 애정을 갖고 말한다는 게 그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했던 적은 없었을까. "이게 다 널 위해서야"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나도 모르게 뱉은 적은 없었을까. 듣는 이는 기억하는데 정작 나는 까맣게 잊은 게 정말 한 번도 없었을까. 기억에 없어 확실치는 않지만, 남은 삶에서라도 한 번도 없도록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