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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Oct 07. 2022

있잖아,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분명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인데, 가죽 피리 소리보다도 못할 때가 있다. 누가 나한테 "사람의 기분을 단번에 가장 확실하게 망쳐 놓는 한마디가 뭘까요?"라고 묻는다면, 이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를 듯하다.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나오지도 않았는데 기분은 벌써 나락으로 떨어져서 마그마를 뚫고, 핵도 뚫고, 다시 마그마를 뚫고, 저어기 지구 반대쪽 남대서양의 우루과이 앞바다로 튀어나오겠다. 한마디로 이건 내가 지금 너를 씨게 때릴 거니깐 손발을 꽁꽁 묶고, 맞아도 아프다 하지 말고 반박은 꿈도 꾸지 말라는 말과도 같다.


그런데, 이 말을 자세히 보자. 말하는 사람은 바로 다음에 나갈 말이 일반적 기준에서 기분 나쁠 말임을 이미 뻔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건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깐 너는 잠자코 받아들이고, 이 말에 기분이 나빠지면 네 잘못이라는 얘기다. 할 말은 하고 싶지만 욕은 먹기 싫고, 한술 더 떠서 상대방의 기분마저 자기 원대로 조종하려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상대방이 기분 상하면 오히려 상대방 책임으로 만들어 버리기. 이건 시(詩)다. 이 많은 뜻을 단 10글자에 모두 담다니! 일체의 군말을 배제한 고도의 압축미를 보여 주고 있는, 그야말로 시문학의 진수이다. 아 글쎄 시라니까!




말에는 사람의 본심이 들어 있고, 본심은 말로 흘러나온다. 진심은 그게 아닌데 표현이 서툴러서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결이 다른 얘기다. 진심은 조용하다. 자기 말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그게 상대에게 플러스가 될지 확실하지 않으면 진심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그것만 진심일 뿐이다.


예전에,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라는 말에 "일단 들어 보고 기분 나쁘든 말든 할게요."라고 했다가 "너 지금 나하고 싸우자는 거냐?"라는 말로 곧바로 반격당한 적이 있다. 결국 그 사람의 프레임은 <나는 너를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거고, 그런 나에게 먼저 싸움을 건 쪽은 너다>라는 거고, 나는 이 프레임에 꼼짝없이 걸려들고 말았다.


이런 화법을 즐겨 쓰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가 솜털처럼 부드러운 언어습관으로 상대방의 감정을 쓰담 쓰담할 줄 알고 배려심도 많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만든 프레임에 자기 자신도 걸려 버린 셈이고,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들이 생각하는 나'와의 격차가 큰 사람들이다. 그게 자의식 과잉이다. 대놓고 나쁜 사람보다도 스스로는 자기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별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나는 개인적으로 더 무섭다.


여기에 세트처럼 따라붙는 말이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의 2단 콤보(팍팍)이고, 여기에 "그래도 나니까 이런 말도 하는 거야"까지 붙으면 그야말로 완벽한 3단 콤보 연속기가 된다(팍팍팍). 나를 그렇게나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관계의 악화 가능성까지 불사하며 용기 있게 할 말을 하는 곧은 사람이기까지 하구나! 뉴턴의 제3법칙(작용-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그 사람의 기분은 하늘을 날아 대기권을 돌파하고 중력장을 이탈하겠지만, 듣는 사람의 더는 떨어질 곳도 없을 정도로 떨어지는 기분은 대체 어쩌면 좋을까.

1.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2.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3. 그래도 나니까 이런 말도 해 주는 거야

사실 이들은 상대방이 잘 되는지는 크게 관심이 없다. 이들의 일차적 관심사는 상대방이 아니라 자기의 기분이다(실제로 이런 사람들일수록 반대 입장이 되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자기의 말이 상대방의 기분을 얼마나 상하게 하는지도 모를 정도에 그치는 공감능력을 가진 사람이 타인에 대해 하는 판단이 진짜 정확하고 도움 되는 판단일 가능성도 그다지 높지 않다.


청하지도 않은 조언을 하면 나에 대한 상대방의 평가가 나빠질 거라는 점, 어쩌면 상대방이 나와 거리를 두려 할지도 모른다는 점. 그들이 그 정도를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런데도 기어코 말을 하고야 마는 건, 그 사람들에게는 상대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데서 오는 심적 안정감 그 하나가 이 모든 것들을 이길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예고도 없이 쑥 들어오는 그 순간을 면할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지금부터 내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이러는 순간 나는 양말을 벗어 그 사람의 입에 턱 물려주고 삑삑 돌려서 에잇 에잇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내리누르는 게 괴롭지만,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는 걸 소득으로 알고 위안을 삼는 수밖에.


다만 스스로 배려심 많고 조심스러운 사람이라는 자의식 과잉에서만이라도 좀 깨어나 주면 안될까. 아무리 착각은 자유라지만 착각도 착각 나름이지 그런 착각은 주변 사람들을 한없이 괴롭게 한다. 도대체 다들 무슨 죄를 지어서 이 모양이냔 말이다. 그러니깐 제발 좀… 레드 썬! 레드 썬! 버럭버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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