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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May 03. 2022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말의 함정

한국 권투사에는 말도 안 되는 경기가 있다. <홍수환(대한민국) vs. 헥토르 카라스키야(파나마)>의 WBA 주니어페더급 세계 타이틀매치. '지옥에서 온 악마'라고 불리는 카라스키야는 11전 11승 11KO, 그러니까 이 선수를 상대로 승리는커녕 모두가 쓰러져 뒹굴 뿐 끝까지 버틴 선수조차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예상대로, 시작하자마자 홍수환은 도대체 이걸 더 진행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무참히 두들겨 맞고 2라운드에만 무려 4번 쓰러진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일찌감치 TV를 껐을 것 같다. 그런데 바로 이어진 3라운드에서 헐크로 변신한 홍수환은 카라스키야를 때려눕히고 믿기 힘든 역전 KO승을 거두고 세계챔피언이 된다.


드라마보다도 드라마틱했던 이 경기는 '홍수환의 4전 5기 매치(1977)'라는 이름으로 아주 유명한데, 나는 이 비현실적인 경기를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지만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그때 전국을 발칵 뒤집은 이 경기를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직장을 그만둔 적이 두 번 있다. 그때마다 들었던 말은 '포기하지 마'였다. 그 앞에 생략된 말을 복원하면 '(쉽게) + 포기하지 마'였을 것 같고, 더 복원하면 "(그렇게 어렵게 얻은 것을) + (쉽게) + 포기하지 마"였을 것 같다. 아예 "그러면 안 되는데" 하는 사람도 있었다. 쉽게인지 어렵게인지, 그러면 되는지 안되는지는 누가 판단하는 것일까? 그리고 '쉽게'라는 말은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나오는 걸까?


"○○소속 공무원, 극단적 선택" 이런 기사가 나오면 주인공은 항상 말단 직원이다. 단지 업무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어느 정도로 비인간적인 괴롭힘이 있었을지, 그런 문제는 타인이 감히 어림짐작으로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다.


나는 공무원이 되신 분들을 교육하는 강연장에서 항상 이 말을 하고 온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말은 너무너무 흔하지만, 강인하고 멋져 보이는 그 말의 뒤에는 희한한 패러독스가 숨어서 히죽거리고 있다고.

<포기의 역설>
뭔가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동안은 인생에서 그 하나를 뺀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공무원의 길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공무원의 길 하나 빼고 모든 길을 포기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녀를 절대 포기하지 않겠어!'

그녀 하나 빼고 이 세상 모든 여자를 다 포기한다는 말이 아닌가?


여기 '공무원', '그녀'의 자리에 무엇을 집어넣는다고 다를까? 시간을 화폐로 생각하면 많은 것이 명백해지고 뭔가를 포기하지 않으려면 자기도 모르게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무수히 생긴다. 당장이 너무 힘들어서 이 사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한테 주변 사람들이 그걸 알려줘야 하는데 도리어 "나 때는 돌도 씹어 먹었어." "왜 그렇게 갑자기 쉽게 포기해?" 이게 되면 이건 그야말로 그 사람 살리기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 다들 참 쉽게도 포기한다.




홍수환은 아무 잘못이 없다. 그는 단지 선수로서의 기본을 지킨 것뿐이다. 권투에서 '땡'하고 경기가 시작되면 아무런 선택지가 없다. KO로 지든 판정으로 지든 기권패를 하든 지는 건 마찬가지다. 이미 외통수니 죽도록 패고 맞고 싸우는 것 말고는 없다.


삶도 그럴까? 아니. 얼마든지 새 길이 있는데 지금 너무 고통스러워 다른 길이 잘 보이지 않을 뿐. 그러니 누군가가 뭔가를 절실하게 포기하고 싶어 하면 나지막이 "너... 괜찮겠어?" 정도로만 물어 주어도 충분하다. 그는 그걸 말하기 전까지 나보다 수십 배는 생각했을 것이고, 내가 그의 고민을 지금에서야 인지했다고 그의 고민도 지금 갑자기 시작된 건 아니지 않은가.


"너희가 홍수환을 알아?"라는 말도 많이 들어 봤는데, 내 대답은 늘 같다. "홍수환의 그 경기는 50년에 하나 나오는 경기지만 저는 50초에 하나 나오는 놈이라서 그렇게는 못하겠는데요." 이럴 때 돌아오는 말은 항상 "정신 나간 놈"이지만 거기서 어떻게 대답하나 그 사람한테 나는 정신 나간 놈을 면할 수 없다. 이리 정신 나간 놈이나 저리 정신 나간 놈이나 어쨌든 정신 나간 놈이다. 어차피 그럴 거면 재미라도 있자.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쉽게' 외쳐서 그 사람이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지는 말자. 포기하지 말라고 해서 그에게 그것 하나 빼고 다 포기하게 만들진 말자. 때로는 포기하는 것이 계속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하고, 어쩌면 그는 끈기가 없는 게 아니라 끊기를 잘하는 것일 수도 있다.



[덧붙임] '지옥에서 온 악마 카라스키야'는 이날의 충격으로 은퇴한 후 정치인이 되어 시의원, 시장을 거쳐 현재는 파나마의 국회의원이고, 그와 40년 만에 재회한 홍수환은 "그는 그날 경기에서 나에게 패하고 링을 떠났지만, 링보다 더 무서운 인생에서 성공한 카라스키야야말로 진정한 챔피언"이라고 말했다.


40년 만에 다시 만난 카라스키야와 홍수환 (사진:연합뉴스)


<※ 글 - 배가본드    표지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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