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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Apr 08. 2024

술을 마시면 정말 진실해질까

그와 나는 목례만 하는 사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쳤지만 서로 밥 한 번 먹어 본 적 없는 먼발치 부서원이다. 하루는 호프집에서 우연히 만나 합석을 하게 되면서 그는 어느새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서로의 호구 조사를 끝낸 우리. 그가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한다.


"내가 나이가 많으니깐 말 놓을게.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형! 이야, 이 친구 진국이네. 아하하~!!"


다음 날. 어제 일이 잘 기억나진 않는다.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더라? 어깨가 뻑적지근 아픈 걸 보니 그와의 어깨동무 시간이 짧진 않았나 보다. 확실히 기억나는 건 그가 나에게 자기를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다는 사실이다.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 부르고 형을 형이라 못 부르는 설움 속에 자랐다지만 형 아닌 사람을 형이라 부르는 것도 만만찮은 고통이다.


복도 저쪽 끝에서 그가 걸어온다. 뚜벅뚜벅. 그와 나는 서로에게 가까워진다. 몇 발자국 앞. 우리는 말없이 목례를 한다. 그리고는 스쳐 지나간다. 아주 자연스럽게. 전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뭐, 이상할 것도 없다. 그도 나도 사회생활 하루 이틀도 아닌데 이쯤이야.




나는 술 약속이 거의 없다. 그런 약속을 안 하려 한다. 하지만 술은 좋아한다. 순전 술만으로 말하면, 술은... 맛있다. 스테이크-레드와인은 맛있다. 연어구이-화이트와인은 맛있다. 피자-맥주는 맛있다. 양꼬치-고량주는 맛있다. 참다랑어회-사케는 맛있다. 산오징어-소주는 맛있다. 심지어 라면-소주도 맛있다. 그 맛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이거 정말 정말 맛있다.


그런데 왜 술 약속이 없냐고?


나는 술이 싫은 게 아니라 술자리가 싫은 것이다. 내 속도로 마시는 것도 어렵고, 다음날 뱃속에서 마치 무슨 나이트클럽에서 조폭들 패싸움이 벌어진 듯한 느낌이 괴롭고, 술을 마셨을 때 발동하는 나의 댕청미를 아무에게나 보여주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댕청미를 보여줘도 좋은 사람은 딱 하나 있다. 내가 술을 같이 마시는 사람은 그 한 명이 유일하다. 그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 앞에서는 술을 아예 입에도 못 대는 걸로 되어 있다(실제 내 주량은 평균 이상이지만 이걸 알리지 않고 사는 게 여러 가지 이유로 편하다).


가장 큰 이유는 술자리에서 왁자하게 난무하는 말들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서이다. 직장에서 상급자가 회식을 제안할 때 그 명분은 늘 상하 소통이다. 하지만 일터에서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이 푸르뎅뎅한 병을 들고 '요이 땅! 지금부터 소통!' 해도 소통 안 되긴 마찬가지다. 사회 초년병 시절 나도 이 잘못을 한 적이 있는데 윗사람이 거나하게 취해서 "평소 못한 얘기 솔직하게 다 털어놓아 봐" 이런다고 진짜 솔직하게 말하는 건 바보다. 그럴 거면 왜 솔직히 말해 보라고 할까. 솔직하게 말하라는 자기부터 솔직한 상태가 아닌데 내 패를 어떻게 까냐고?

요이 땅, 지금부터 소통!

정말로 술을 마시면 진실해질까? 잘 모르겠다. 진실해지기보단 그냥 좀 멍청해지는 듯하다. 평소에 잘 드러내지 않던 속내가 튀어나오는 건 맞다(하지만 헛소리를 할 가능성도 못지않다).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자신만 알지만 어떨 땐 자신조차 모를 수 있다. 술김에 어쩌다 얻어걸리듯 멋진 말을 해서 나중에 봐도 아까울 정도로 멋있으면 "아, 그거야말로 내 진심이었어!" 이게 되지만 내가 대체 뭔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나 싶으면 "그건 내 진심이 아냐! 술김에 헛소리 한 거야!" 이게 될 거 아니냔 말이다. "내가 언제?" 이럴 수도 있고 :)


어떤 사람이 뭔가 속마음을 품고 있는 상황에서 그걸 그대로 내놓으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예상하고 그걸 내놓을지 말지 주저한다면, 그 망설임 역시 또 하나의 진심이다. 상대의 마음이 다칠까 염려하기, 상대와 자신의 심적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지 생각하기, 혹시 있을지 모르는 제삼자의 곤란한 입장은 없을지 살펴보기, 그것들도 하나하나 다 진심이다. 그렇게 저마다 다른 곳을 향하는 진심들이 합성되어 '말 안 함'이나 '표현을 달리함'이 되면 그건 그 사람 안의 여러 진심들이 합작한 최종 결과물로서의 진심이고, 그 사람 안의 수많은 진심들이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해서 이룬 평형상태이다.


술을 마신다. 전전두엽 동작 그만! 모든 진심들은 정지되고 하나만 살아 파닥거린다. 이제 뱉는다. '퉤!' 이게 진실이냐? 배설이지. 그렇게 뇌의 특정 부분의 스위치를 내려놓고 한 부분을 쏙 적출해서 퉤 뱉으면 그렇게 드러내는 마음이 더 진실한 게 되는 건지 난 잘 모르겠다.


달달한 목소리와 가사로 여심을 자극하는 오래된 노래 <취중진담>은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여러 설문조사에 의하면 실제로 많은 여성들은 취중 고백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라도 누가 길바닥은 침대요 하늘은 이불인 상태에서 나에게 "좋아한다구요!" 하고 고백 공격을 날리면 되게 별로일 것 같다. 술에 기대어 고백하는 마음은 어쩌면 고백이 거절당할 때의 두려움을 술기운으로 마취하기 위함은 아닐까.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조그만 '새 같은 것'이 온 힘을 다해 껍데기를 온몸으로 부수고 밀어내는 게 안쓰러워 보여서 그걸 도와준 적이 있다. 내 손이 모자라서 모든 아이들을 다 도와주지는 못했다. 그런데 내가 도와주지 않은 아이들은 밥도 잘 먹으면서 팔팔하게 뛰어다녔지만 내가 도와준 아이들은 다들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안 가서 픽 죽어 버렸다.

진실이라는 건 매우 주관적인 거지만, 내가 생각하는 진실함은 진실해지기 위해 술의 힘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이다. 만약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전전두엽이 그걸 억제한다면, 그 억제 방향의 벡터들을 이겨낼 정도로 사랑하는 마음이 강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껍데기를 뚫고 나온 진심은 그야말로 진심이다. 거기엔 힘이 있다. 세파에 꺾이지 않는 강한 힘이.


사랑 말고도 공감이든, 위로든, 연민이든, 호불호든, 이의제기든, 다른 감정들에 대해서도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전하고 싶다면 술의 힘에 의지해 진심을 호소하기보다는 맑은 정신으로 진심을 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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