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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Nov 25. 2022

고기는 먹지 않지만 채식주의자는 아닙니다

이 무슨 해괴한 소린가?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이거 같네. 그런데 정말이다. 나는 고기는 먹지 않지만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그 '-주의(-ism)'라는 말이 통 맘에 들지 않는다. '-주의'라니 이것마저 뭔가 설전이나 토론을 해야 할 것만 같다. 고작 망아지처럼 풀때기만 쿰척쿰척 거리는 것에 자그마치 무슨 주의씩이나 갖다붙이는 건 어째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고 그냥 채식을 하는 상태일 뿐이다. 이 상태를 이념으로 박제해 버리는 '채식주의'라는 말은 어쩐지 불편하다.


채식에도 층위가 있는데, 나는 생선이나 유제품이나 계란은 먹고 적색육과 가공육만 먹지 않는 페스코 채식(pesco-vegetarian)이다. 대개 채식자들은 환경이나 윤리의 문제로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고, 어디 질병이 있어서 하는 식이요법도 아니고, 언젠가 재미삼아 해 보니 내 몸에 잘 맞는 것 같고 풀의 맛에 푹 빠져서 지금까지도 그러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나에겐 이것은 단순히 취향일 뿐 주장이 아니고, 주의(-ism)는 더욱 아니다.




최근에 채식주의자들이 고기를 팔고 있는 음식점에 난입해서 육식에 대해 항의하고 즉각 이 폭력적인 육식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며 영업을 방해한 사건이 있었다. 이런 극단적 행동까지 하는 사람은 채식자들 중에서도 소수이겠지만, 채식과 비채식 간의 열띤 갑론을박은 인터넷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영업 중인 고깃집에 난입하여 육식 중단을 촉구하는 채식주의자들 (출처 서울경제)

혼자 조용히 자기를 위한 채식을 하지 않고 타인에게 채식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사람들은 채식을 취향(식성) 문제가 아니라 동물보호, 환경보호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그분들의 주장은 대체로 동물과 인간은 함께 생태계를 이루는 일원이니 동물에게 비윤리적인 행위를 해선 안되며, 고기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온실가스나 배설물 등 여러 유해물질이 환경에 악영향을 주니 채식을 해서 지구를 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나는 독수리 오형제가 아니라서 지구를 구할 수 없다. 나 역시 채식을 하고 있긴 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이 다 나를 따라하고 나아가서 전인류가 모조리 풀을 먹는 80억 독수리 형제가 되어도 지구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풀을 뜯어먹는 개는 있어도 풀을 뜯어먹는 독수리는 전생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닌 게 아니라 개는 가끔 진짜로 풀을 뜯어먹는다)

축산업이 막대한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동물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실에는 비건이든 논비건이든 다 동의한다. 그런데 여기서 흔히들 간과되는 건, 아예 구석기시대처럼 채집만 하고 사는 시대도 아닌 이상 고기 섭취를 없애고 완전 채식으로 이행했을 때 그 많은 곡물과 채소를 얻기 위한 대규모 경작 행위도 천문학적 양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엄청난 물을 소비하며 그 과정에서 무수한 동물을 죽이고 삶의 터전을 뺏는 등 무지막지한 생태계 파괴 행위를 할 수밖에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결국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완전 채식으로 바꾼다고 쳐도 그게 실제로 지금보다 환경에 이로우며 동물에게 해를 주지 않는다고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가 없다.


지금 내가 먹는 이 1개의 아보카도를 위해 무려 160리터의 물이 사라지고 무려 420g의 온실가스가 생기고 내가 낸 돈이 중남미 아보카도 시장을 장악한 마약 밀매 조직의 주머니를 채워 주고 있다면? 지금 내가 마시는 에티오피아 커피가 배고픈 흑인들을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이 하루에 식빵 3개만 주고 온갖 구타와 가혹행위로 하루 20시간을 부려먹으며 만들어졌다면? 내가 아침마다 먹는 샐러드에 들어가는 유기농 작물들이 암탉과 수탉의 개체 수를 20:1의 균형 상태로 유지해 주기 위해서 상품성 없는 수평아리들을 분쇄기에 갈아 죽여 만든 ‘천연 비료’로 키워진 것이라면? 내가 거실에서 영화를 보며 먹는 아몬드의 경작지를 개간하려고 광활한 숲을 불태워 셀 수 없이 많은 생물들이 산 채로 타 죽거나 살 곳을 잃어버리고 숨이 채 끊어지지 않은 대형동물들은 두들겨 맞고 엽총에 맞아 코와 입으로 피를 쏟으며 죽어 가야 했다면?


채식과 비채식, 어느 쪽이 환경에 더 해롭고 어느 쪽이 더 많은 생명을 해치는지 그것까지 비교 분석하고 싶진 않다. 다만 내가 그렇게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의나 비윤리에 가담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은 잊지 말고 살기를 원할 뿐이다. 당장 내 몸에 걸치고 있는 옷 하나조차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르는데 뭘 먹고 사느냐 거기에서까지 대뜸 정의나 윤리를 외치기엔 우리가 알고 있는 게 너무 없다.


채식과 비채식의 문제도 그렇지만, 이 밖에도 자기가 직접적으로 깊게 관여되어 그 사정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제삼자들 간의 문제에서까지 정의와 윤리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그 복잡한 걸 어떻게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단순하게 갈라치기해서 그토록 명료한 입장을 가지게 된 것인지 어떤 의미에서는 신기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부러울 때가 있다.



중국의 제선왕은 제사의 제물로 바쳐질 소의 슬픈 눈빛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제선왕은 소를 제물로 바치지 않을 것을 명했고, 제선왕의 측은지심으로 소는 생을 연장했다. 맹자는 제선왕의 측은지심을 높이 평가했다고 전해진다. 소 대신 제물이 된 것은 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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