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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Dec 08. 2022

짜릿한 꼴등의 추억

어릴 때, '음치'라고 불리는 친구가 있었다. 노래를 못해서가 아니라 성이 음이고 이름의 두 번째 글자가 치다. 세 번째 글자도 있었지만 모두가 음치 음치 하고 불렀고, 심지어 선생님마저도 그렇게 불러서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이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바로 내가 이 음치와 옆자리 짝꿍이 되었다. 원래는 남녀 한 명씩 짝을 지어 주는데 반에 남자가 여자보다 2명 많아서 남자 중 2명은 서로 짝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제일 말 안 듣고 학습 태도 안 좋은 둘을 맨 뒤로 쫓아 보냈는데 그게 바로 음치와 나였던 것이다.


"으으 이 배가본드님이 여자애랑 짝을 못하게 되다니 이게 다 음치 네놈 때문이다"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 어떻게 하면 음치를 곯려줄까 날이면 날마다 골몰하던 어느 날.


"자 여기 보세요. 이번 달 시험문제는, 각자 알아서 책을 보고 만들어 오세요. 그걸 짝하고 서로 바꿔 풀 거니깐. 알았죠?"


하늘이 주신 기회다! 음치를 완벽히 곯려 줄 수 있게 되었다. 문제를 만들자, 문제를.

<국사>
문1) 조선시대 향약의 4대 덕목이 아닌 것은?
 ① 덕업상권                 ② 과실상규  
 ③ 예속상교                 ④ 근친상간

문2) 이순신 장군이 전란 중에 썼던 일기는? 
 ① 난중일기                 ② 취중일기  
 ③ 커플일기                 ④ 다이어리

문3) 한글을 만든 임금은?
 ① 세종                       ② 관종


뭐야 너무 쉽잖아? 이건 뭐 dog도 만점, cow도 만점이겠네. 이래서는 음치를 골탕 먹일 수 없어. 찢어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냈다.


<국사>
문1) 우리나라 국보 1호 남대문 그림이 있는 곳은 국사책 몇 페이지인가?
문2) 지디피는 국내 총생산을 뜻한다. 그러면 새발의 피는 무엇을 뜻하나? 
문3) 임진왜란 때 일본은 조선에게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냥 다들 지나가게 해 주고 빈집털이 하면 안 되나?
<산수>
문) 연필을 5자루 사고 500원을 내면 거스름돈을 50원 준다고 한다. 그렇다면 철수는 연필을 왕눈이 문방구에서 샀을까, 짝눈이 문방구에서 샀을까?


냐하하~ 음치 넌 이제 죽었다. 내일의 태양은 휘황찬란하리라.

다음날.


"자, 문제는 다 잘 만들어 왔죠?"

"네~~"

"그래요. 배운 걸 가지고 그렇게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공부가 많이 되었을 거예요. 그럼 이제 시험지를 꺼내서, 각자가 만들어 온 문제에 답을 달아서 내세요. 자기가 만든 문제니깐 자기가 답을 제일 잘 알겠죠? 이번 월말고사는 그걸로 대신할게요."

"네~~~!! :) :)"


다들 신나서 답을 써내는데 나는 한 문제도 답하지 못하고 시험지에 비듬만 털고 있었다. 전과목 백지니 볼 것도 없이 꼴등이다. 가문의 역사에 남을 치욕적인 꼴등이다.


에이 정말 되는 일 하나도 없다 없어


한 유력 정치인이 말한다. "청년들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꿈이 없어서 불행하다." 그런데 정작 어릴 때 꿈을 가지면 돌아오는 말은 거의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해'이다. 그렇게 '정답 사회'에서 철저히 한국형 인간으로 양성된다. 


그런데 아이고, 웬일이니 파리똥이다. 청년들은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했는데 이젠 일할 곳이 없다. 멀쩡한 인서울 대학을 졸업하고도 식당이나 배달 알바를 전전하고, 지원하는 곳마다 경력을 요구받고, 그나마도 대부분 인턴이고, 어쩌다 간신히 일자리를 구해도 임금 착취, 고용 불안, 직장 괴롭힘 등 온갖 이유로 고통을 호소한다. 조금만 꿈을 꾸면 사람은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길을 가야 한다며 막아 서더니, 이젠 청년들은 꿈이 없으니 불행하다고 한다. 꿈을 펴고 날라고 한다. 국영수만 공부하느라 꿈을 펴고 나는 법 따위는 전생에서도 들어본 적 없을 텐데?


그래, 그도 인생선배로서 청년들이 안타까운 마음에서 그랬겠지. 하지만 그의 앞뒤가 바뀐 말이 담고 있는 공감능력은 어쩐지 아쉽다. '꿈을 잃은        를 치유해야 한다' 그는 여기 들어갈 말을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꿈을 잃은 우리 사회를 치유해야 한다'일까, '꿈을 잃은 청년들을 치유해야 한다'일까?


사회가 개인을 다 책임져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사회는 개인이 땀을 흘리면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다는 예견만 가능하게 해 주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조차 안 되니 3포 세대니 N포 세대니 하는 거고, 어떻게든 현재를 살아내려는 그들의 최후의 선택 아닐까. 이 모든 맥락을 뭉텅 잘라먹고 청년들이 꿈이 없다며 훈계하려 하거나 불성실 또는 의지박약 레퍼런스로 보는 게 과연 맞는 건지 난 정말 모르겠다.


어떤 꿈을 가질 것이며, 어떻게 꿈을 이룰지 항상 고민하라


청년들에게 이걸 주문하는 사회도 대답을 알긴커녕 애초에 대답 따위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듯한데. 자신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고 스스로도 대답을 못하는 물음을 남한테 던져 주면 언젠가는 거기에 스스로 답해야 할 때가 온다. 그땐 어쩔텨? 있자나, 내가 딱 그러다 진짜 꼴등한 적 있거든. 그런 경험은 나 하나로 족하다고. 그렇잖아도 OECD 행복지수 하위권에서 개굴개굴 하고 있다면서. 그러다 진짜로 꼴등 한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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