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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Aug 07. 2022

혹시, 혈액형이 어떻게 되십니까?

나의 혈액형은 B형이다. 그런데 맞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누가 나한테 혈액형을 물으면 "맞혀보세요"라고 질문을 되돌려 준다. 처음엔 다들 하도 못 맞혀서 제발 좀 맞혀 보라는 생각에서 그랬는데, 현재는 그걸 묻는 그 사람 눈에 비친 나의 특징이 뭔지가 궁금해서로 이유가 바뀌어 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A형 맞죠?" 이랬던 적이 있다.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틀렸지만 일부러 "맞아요" 해 봤다. 그 사람을 갖고 놀려고 한 게 아니라, 틀렸다고 하면 그 사람 성향상 이어지는 말은 "의외네?"가 될 것 같았고 그 "의외네?"라는 건 내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캬~ 그럼 그렇지."

"어떻게 아셨어요?"

"너 원래 조용하고 뒤끝 있잖아? 내 딱 보면 알지."


아아, 그는 나조차도 잊고 사는 나의 발생학적 자아를 마리아나 해구의 심연에서 건져 올려 주었다. 혼돈과 자아상실의 시대에 나의 정체성을 손수 대신 찾아 준 고마움에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다(?). 이 각골난망한 고마움을 한평생 무슨 수로 갚아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1년 후, 그걸 또 물었다. 대화 도중 뜬금없이 "실례지만 혈액형이?"라고 묻는다. 이 인간이 설마 1년 사이에 내 혈액형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고 보는 건 아닐 테고, 아마도 작년에 나한테 그걸 물었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린 게 분명하다. 순간 고민이 되었다. 뭐라고 할까?


(1) 한번 알아맞혀 보세요. (늘 그래 왔듯)

(2) 저는 아직도 여전히 A형입니다! (장난기 발동)

(3) B형인뎁쇼? (어떻게 나오나 함 볼까?)

(4) 실례인 줄 알면 묻지 마쇼 (까칠 모드)


잠깐 고민하다가, (3)을 택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럴 줄 알았다"라고 한다. "어떻게 아셨어요?" 하니 "너는 흥미 없는 거엔 관심 안 가지잖아?"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내가 흥미 없는 것에 관심을 잘 주지 않는 건 맞는데, 그럼 흥미 없는 거에 푸욱 꽂혀서 칠렐레팔렐레하는 사람도 있단 말인가?


인터넷에서 B형의 특징을 찾아보았다.

○ 고정관념을 싫어한다.
○ 꼬리가 되어 끌려다니기 싫어한다.
○ 뭔가 못한다는 말을 듣기 싫어해서 맡은 일을 잘하고 싶어 한다.
○ 좋아하는 일에 열정적이나, 관심 없는 일에는 무관심하다.
○ 가깝지 않은 사람한테는 차갑지만 가까운 사람한테는 따뜻하다.
○ 뭔가 이거다 싶으면 시야가 좁아진다.

읽어 내려갈수록 헛웃음이 났다. 아니, 고정관념이 좋은 사람도 있어? 꼬랑지가 되어서 질질 끌려다니는 게 좋은 사람도 있어? 너 뭔가 못한다는 말이 듣기 좋은 사람도 있어? 맡은 일을 잘하기 싫은 사람도 있어? 좋아하는 일에 열정적이지 않고 관심 없는 일에 무관심한 거, 가깝지 않은 사람한테는 차갑지만 가까운 사람한테는 따뜻한 거, 뭔가 이거다 싶으면 시야가 좁아지는 건 'B형'이 아니라 '사람' 아니야?


B형의 키워드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임'. 그런데 '난 정말 이기적인 것 같아'라는 생각은 누구나 해 봤을 것이고 "분석 결과 당신은 다소 자기중심적"이라 하면 누구라도 '내가 좀 그렇긴 하지.' 이게 될 것 아닌가? 한 술 더 떠서 "환경과 교육 등에 따라 일부 변화가 있을 수 있음"이라고 덧붙여 주었으니 그야말로 100% 적중하는 분석이 됐다.


다른 혈액형들 설명도 다 읽어 봤는데, 그 특징들을 모조리 뒤섞어 놓았어도 많은 사람들은 "맞아 맞아, 딱 나네!" 하지 않았을까.




만약 누가 '특정 형은 이러이러하다' 중 몇 개가 나랑 겹쳐 보인다고 나를 그 형에 넣는 것까진 괜찮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지점부터 발생한다. 그 사람이 나를 그 형에 넣는 순간, 그 형의 성질이라고 되어 있는 다른 속성들도 내 것이 되어 버린다.


"대체로 기분파" "불같고 직설적이지만 쏟아내고 훌훌 잊어버림" "좁고 깊은 관계보단 얇고 넓은 대인관계를 선호" "활달한 성격으로 분위기 주도" "사랑에 쉽게 확 빠지고 확 식음" "자신을 적극 홍보하려 함" "약속시간에 잘 늦음"... 나와는 거리가 아주 먼 말들인데, 내가 B형임이 탄로 나는 순간부터 이것들은 그게 틀림을 나 스스로 입증하지 않는 한 모조리 나의 기본값으로 세팅되어 버린다.


별로 가깝지 않은 사람이 "혈액형이 어떻게 되십니까?"라고 했을 때 불편한 건 그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너를 잘 알고 싶어서라는 그럴듯한 구실이지만, 나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건 사실상 '너를 카테고리화하겠다'라는 말이고, '너에 대해 파악되지 않은 부분은 그 카테고리의 특성에 투사해서 연역적으로 의제하겠다' 결국 이거 아닌가?


실제로 어떤 사람은 내가 B형임을 알고 나에게 "약속시간   지키죠?"라고 물은 적이 있다. 하지만 약속시간 전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는  실제로는 거의  쪽이다. 그런데 그걸 말하면 "이상하네, 그건 A형인데." 이게 되니 환장할 노릇이다.


또 한번은 직장 선임이 점심시간에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자기 휴대폰을 내 눈앞에 들이대면서 유튜브 동영상을 하나 보여준 적이 있다. 재미있으니까 끝까지 보라고. 그런데 그건 개가 싸우다 한쪽이 죽는 동영상이었다. 왜 이걸 보여줬냐고 물으니 "좋아할 거 같아서"라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B형은 화끈한 거 좋아하잖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사람은 그 후로 아무 생각 없겠지만, 나는 지금도 특정 종의 개를 보면 그 동영상이 떠올라서 괴롭다. 연역적으로 의제하기가 이렇게나 위험하다.


요즘은 혈액형보다 MBTI를 더 많이 묻는다. 그런데 혈액형이든 MBTI든 타인에 대해 충분히 알기도 전에 그것부터 궁금해하는 사람의 공감능력이 평균 이상일 가능성은 내 경험상 높지 않다. 그냥 재미로 묻는다는 사람도 있는데, 뭔가가 자그마치 재미씩이나 있는 동안 그 정도로 의미 없기도 어렵다.


나라면 누군가한테 관심 있고 그 사람을 더 많이 알고 싶으면 혈액형은 일부러라도 더 안 물을 것 같다. 내가 갑자기 큰 사고를 당했거나 급하게 큰 수술을 받아야 할 때 그 사람이 흔쾌히 나서서 수혈이라도 해 줄 정도가 되었다고 확신이 들면, 그때는 어쩌면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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