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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Jul 17. 2022

힘들어 죽겠으면, 간식이나 먹어라

아이고 추장님, 제발 사람 좀 살자고요

난 포털 뉴스를 거의 보지 않는다. 별로 즐거운 뉴스가 없다. 기사 자체도 그렇지만, 밑에 달리는 댓글들을 제3자로서 보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괴로울 때가 많다. 여러 가지 이유로 뉴스는 아예 외면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런데 우연히 포털 뉴스에서 이런 기사를 보게 되었다.


<시험 도중 물 마시면, 성적이 '쑥쑥'>

 [기사 인용 : 이데일리 (2012.4.26.)]

시험 도중 물을 마시면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이스턴 대학과 웨스트민스터 대학 연구팀이 공동 연구한 결과, 시험을 볼 때 물을 마신 학생은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점수가 평균 5% 높게 나타났다... (중략)... 이스트런던 대학의 크리스 포슨 교수는 "시험 도중 마시는 물은 뇌의 사고 작용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마음을 차분하게 해 문제를 좀 더 집중해서 풀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좀 더 자세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학교와 수험생들은 시험시간에 물을 들고 들어가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말? 금붕어처럼 물만 꼴깍꼴깍 마시면 되는 건가? 물을 챙겨서 시험장에 올 정도의 사람은 다른 면에서도 평소에 준비성 있는 편이라서 시험도 대체로 꼼꼼하게 준비했을 가능성이 높아서는 아니고?


피서철에 아이스크림이 많이 팔리고 물놀이 익사자가 늘었다고 "아이스크림에는 익사 확률을 높이는 성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면 누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거기다 "좀 더 자세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여름철에 물놀이하려는 사람들은 아이스크림을 멀리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라고 덧붙인다면?


누구나 그렇듯 나도 이런 식의 착각을 나도 모르게 많이 하면서 살지만, 공들인 연구 결과를 다수에게 발표하는 크리스 포슨 교수에게도, 이 말을 옮기며 '시험 도중 물 마시면, 성적이 쑥쑥'이라고 제목을 뽑아 버린 기자에게도 독자로서 약간의 아쉬움은 남는다.




작년 9월쯤부터 채식을 하고 있다. 생명에 대한 숭고한 외경심이 있다거나 탄소 과잉으로 병들어 가는 지구를 구하겠다는 거창한 사명감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슬림한 몸이 좋고 풀이 맛있어서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채식한다고는 말해도 채식주의자라고 하진 않는다. '무슨무슨 주의자' 이런 말 별로 안 좋아한다. 채식은 이념(-ism)이 아니라 상태일 뿐이니까.


주변에 좀처럼 알리지 않는다. 채식하면 무병장수한다고 권하지도 않는다. 정말 그런지 확신이 없다. 대다수가 선택의 여지없이 채식만 하는 가난한 나라에서 그런 연관성이 나타나지 않는 것도 그렇고, 채식을 심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사람도 많고, 아예 건강상 오히려 채식하면 안 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미국에서 어떤 부모가 18개월 된 아이한테 채식을 강요하다 아이가 죽고 말았다는 뉴스도 봤는데, 참 슬픈 일이다.


무병장수는 장담 못해도 직접 만들어 차리는 재미는 확실합니다. 계피 넣은 메추리알 장조림, 아보카도, 바나나, 고구마, 아스파라거스, 흑토마토 수프. 가운데 잔은 술이 아니라 밤꿀

채식자들이 비채식자들보다 오래 사는 건 그들이 보통 건강에 관심이 많아서 건강검진 결과에도 신경을 더 많이 쓰고, 대체로 운동도 더 하고, 대체로 자기를 더 관리하고, 과식이나 술 담배도 대체로 안 해서는 아닐까. 채식자가 속옷 바람으로 탄산음료를 마시며 TV 앞에서 종일 뒹굴거리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채식이 주는 좋은 영향이 분명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가 채식의 효과가 너무 과대평가되진 않을까.


사실 채식의 본질도 꼭 필요하지 않은 걸 멀리하고 절제하는 미니멀라이징에 있지, 망아지처럼 풀때기만 쿰척거리는 데 있지 않다. 채식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암만 풀만 으그적 으그적 해 봤자 변하는 건 고기 맛이 그리워서 가끔은 마우스 패드를 육포처럼 뜯어먹고 싶게 되는 정도?




나의 직장은 극단적 선택을 하는 직원이 자주 나오기로 유명하다. 한번은 건물 로비에 마련된 분향소에 누가 익명으로 익명으로 쓴 글이 눈길을 끌었다. "당신이 이렇게 떠난 것보다, 결국 무엇도 바뀌지 않을 거란 사실이 더욱 슬픕니다."


 일이 있고 며칠 , 상부에서 조직문화 개선을 위한 의견을 제출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오랜 학습효과로 소용없을  뻔히 알아서 아무도 내려고 하지 않았고, 결국 모두가 강제로 제출하게 되어서  자체가 또 하나의 일이 되었다. 다양한 건의들이 있었고, 직장  괴롭힘과도한 내부 의전에 대한 지적이 가장 많았다.


그러나 그 수많은 의견들 중 '그'가 채택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대신 그는 하나를 써 넣었다. "직원들 사기 진작을 위해 주 2회 간식 제공" 그러면서 간식을 제공한 타 기관의 유사 사례를 조사해서 직원 자살률, 이직률이 낮은 케이스를 취사선택해서 근거로 첨부하라고 한다.


설령 간식을 주는 곳이 자살률이 낮더라도 그게 간식을 줘서 자살률이 낮은 걸까? 간식을 주거나 구내식당 밥이 맛있는 직장은 직원 복지나 근무환경, 조직문화 등에 신경을 쓰는 직장일 가능성이 높고, 직원의 자살률이나 이직률도 대체로 낮을 것으로 추정하는 게 어쩌면 더 나은 해석은 아닐까?


투신해서 죽으려고 높은 데 올라가 있는 사람한테 "야! 당장 이리 내려와! 왜 그래? 나랑 말 좀 하잔 말이야! 원하는 거 다 해줄 거니까 빨리 내려왓!!" 이랬을 때, 그 사람이 "일주일에 두 번 간식을 주세요! 그럼 힘내서 살아 볼게요!" 이럴 가능성이 몇 %나 될까?




존경해 마지아니하는 추장님. 사람이 죽고 살고 하는 건 개그의 영역이 아닙니다. 만약 추장님이 숨만 쉬어도 깔깔 웃기고 평소에도 언행 하나하나가 다 코믹하신 그런 분이시라면 몰라도, 실제론 그것도 아니시잖아요? 직원들이 입을 모아 문제라 말하는 것들은 죄다 그어 버리고는 재발 방지 대책이 전 직원 간식 제공이라니요. 지발 사람 좀 살자고요. 지발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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