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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Mar 29. 2023

일 년 뒤에도, 또 일 년 뒤에도

이제는 완전히 봄이네요. 수십 명의 작가님들이 저마다 봄을 들고 오시니 제 피드가 꽃밭이 되었어요. 저는 일 년 전 오늘 돋아났는데, 그때도 봄이긴 했지만 구독자(0)+관심작가(0)+발행글(0)+방문수(0). 이 공포의 사빵(four 0's) 앞에서 피드도 텅텅 비어 있으니 봄이고 나발이고 느낄 뭣도 없었죠. 그러니 제겐 사실상 브런치에서 처음 맞는 봄이네요.

이 순간의 느낌은 글쟁이들조차도 표현이 어렵죠.

그때 돋아나신 분들이 많았나 봐요. 1주년을 자축하는 글들이 많네요. 처음엔 두 달은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어느덧 이렇게 됐네 하면서도, 다른 작가님들처럼 자축까지 하기는 쉽지 않았어요. '넌 1년을 하고도 그것밖에 못 했니?' 하는 목소리가 제 안에서 올라와서요. 365일에 글 72개가 고작이라니. 실제로 저랑 같은 달에 시작하셨던 관심작가님들 중 저보다 적게 쓰신 분은 한 분도 없거든요. 브런치에 존재하는 모든 숫자에서 저는 미미하지만, 발행 글 수만은 유일하게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데도 그 하나조차 저는 이러니까요.




산에 올랐어요. 그저 앞사람 뒤통수만 쳐다보고 따라갔죠. 그게 제가 높은 곳을 오르는 방법이에요. 그 사람이 멈추거나 나의 속도와 맞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뒤통수를 보지요. 그렇게 한참을 가다 멈추고 아래를 봤어요.


높아요.

어지럽네요.

다들 어디 갔지.


고마워요. 이게 다 당신의 뒤통수 덕분이에요.

물고기는 무수히 많은 알을 낳지만 일 년 뒤 살아남아 성어가 되는 건 소수죠. 하루만 해도 수많은 브런치 작가들이 태어나지만 일 년 뒤에도 여전히 처음처럼 쓰고 있는 사람은 소수죠. 다른 작가님들처럼 일 년 됐다고 글을 올려 자축할 자격까진 없다고 보았는데, 어쩌면 제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을 잘 쓰는 사람이기 전에 다른 분의 창작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고 싶었어요. 그렇게 일 년의 대부분을 독자로 존재하면서, 가끔은 쓸 때도 있었죠. 그러던 중에도 글을 잘 쓰는 작가님들이 부럽다는 생각도 문득문득 들었고, 때론 욕심도 났어요.


처음에는 그분들만큼 쓰고 싶은 마음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그분들이 거쳐갔던 길을 고스란히 뒤밟아 가고 싶은 생각에 가깝네요. 그분들이 지금 계신 곳에 제가 도달할 때 그분들은 그 시간만큼 앞으로 나가 계실 테니 저는 항상 따라가는 입장일 수밖에 없는 거죠. 그분들을 영영 따라잡을 순 없겠지만 지금 그분들이 계신 곳에 나중의 제가 있을 수 있다면, 지금 그분들이 저에게 그렇듯 어쩌면 저도 그땐 누군가에게 뒤를 밟아 보고 싶은 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글솜씨라는 건 없고 생각솜씨, 사유솜씨만 있을 뿐이라 생각해요. 그건 오래 쓸수록 크는 솜씨고, 오래 써야만 크는 솜씨죠. '잘 쓰기'가 아닌 '오래 쓰기'가 목표인 건 그 때문이었어요. 오래라는 말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품고 있으니까요.


'자주 써라! 그래야 글쓰기 근육이 붙는다!' 그런 말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생각솜씨 키우기라는 본질보다 글 쓰는 행위 자체가 목표가 되었다간 늘 사용하던 근육만 사용하게 될 것 같았어요. 안 쓰던 근육을 써 보고 싶었고, 멈춤의 시간을 자주 갖고 싶었고, 많이 쓰기보단 많이 읽고 싶었어요. 이러니 저의 시계는 다른 분들에 비해 느리네요. 가끔은 불규칙하고요.


하지만 저는 알아요. 가로축을 평생의 시간으로 잡아 버리면 지금의 불규칙은 아예 보이지도 않으니, 단기적으론 등락을 거듭해도 장기적으로는 우상향 곡선이면 충분하다는 걸요. 사람들이 말하는 꾸준함이 '길지 않고 규칙적인 주기' 정도를 뜻한다면, 저는 꾸준함보다는 오래를 바라보고 싶어요.


작가는 다른 사람들보다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이죠. 시간이 얼마나 더 지나도 글쓰기가 저에게 쉬운 일이 되진 않을 것임을 알아요. 잘 쓰는 것보다 오래 쓰는 게 더 힘들다는 것도요. 아무리 해도 쉬워질 수 없는 걸 오래 한다는 그 하나가 저에겐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다른 목표를 더 담을 수가 없어요.


이틀 만에 쓸 수도 있겠죠. 열흘 만에 쓸 수도 있겠죠. 아예 한 달 정도 놀아 버릴 수도 있겠죠. 다만 일 년 뒤에도 지금처럼 쓰고 있길 원해요. 또 일 년 뒤에도 그때처럼 쓰고 있길 원하겠죠. 그렇게 십 년 뒤에도 지금처럼 쓰고 있길 바랄 뿐이에요. 그때는 저도 스스로에게 '나 그래도 글쓰기 조금 해 봤어'라고 말할 수 있겠죠.


다른 작가님들이 남겨 놓으신 발자국을 보며 부지런히 따라가는 지금, 처음에 그분들의 따뜻한 마음을 받아 보았던 기억을 일 년 뒤로, 또 일 년 뒤로 고이 가져가서 나중에는 그 마음을 그대로 다시 내어 놓을 수 있길 바라며...




저는 써야만 하는 사람이에요.

돌아서면 잊어버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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