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카페는 한겨울에도 빙수를 판다. 팥빙수, 커피빙수, 인절미 빙수, 딸기빙수, 멜론빙수, 애플망고빙수. 계절에 상관없이 빙수를 찾는 나를, 어느 날 어느 시간에 기습적으로 쳐들어올지 모르는 나를, 그 카페는 매일 새벽 2시까지 기다린다.
빙수는 글가본드를 깨운다. 기본적으로 작가라기보다는 독자에 가깝지만 오늘은 나도 뭐라도 써 볼까 싶으면 노트북을 싸 짊어지고 나가서 슬그머니 자리를 잡는다. 계절에 상관없이 즐길 수 있는 빙수, 우리나라에서는 흔하게 누릴 수 없는 호사다.
필리핀에는 할로할로(halo-halo)라는 국민 빙수가 있다. 할로는 현지어로 '섞다'니 할로할로는 '섞어 섞어' 정도 될 것 같다. 우리식 팥 대신 우베(ube, 자색고구마)로 만든 고물, leche flan이라고 하는 커스터드푸딩, 바나나를 설탕에 끓여 졸인 bananas foster, 남국의 정취가 과일이 된 잭프루트, 코코넛 국수, 콩조림 등을 빙 둘러 토핑을 한다.
할로할로는 어딜 가든 쉽게 볼 수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최고는 차오킹(Chowking)이라는 현지 패스트푸드 체인점의 것이다. 작은(petite) 사이즈 1,100원, 큰(fiesta) 사이즈 1,800원 정도인데 제법 포만감이 있어서 적게 먹는 사람들은 이걸로 점심식사를 대신하기도 한다.
우리네 빙수는 보통은 여름에만 팔지만 필리핀의 할로할로는 연중 사계절 내내 있다. 아, 잠깐만. 필리핀에 뭔 놈의 사계절이 있냐고? 있다. 내가 안다. (1)hot (2)very hot (3)very very hot (4)very very very hot 이렇게 사계절이 있다. 아 글쎄 있다니까!
내가 필리핀에 있었던 게 5년 정도니 일 수로는 1,500~2,000일 정도 될 텐데, 먹은 날이 안 먹은 날보다 많은 듯하니 아마도 1,000개는 먹은 것 같다. 처음에는 보자마자 휘휘 섞었다. 할로할로니 당연히 섞는 것 아니랴? 우어어~! 상남자처럼 박력 있게 섞었다. 코코넛 젤리가 맹렬히 튀어 옆 테이블 꼬마의 콧구멍에 박혔다. 그러게 누가 거기 있으래? 그러거나 말거나 호기롭게 한 스푼 크게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완벽한 개밥이었다.
개한테 보통은 전용 사료를 주지만 요즘도 시골 가면 마당에서 어슬렁거리는 시고르자브 종한테 그 왜, 찌그러진 양푼에 주는 밥찌꺼기. 딱 그거였다. 우베 아이스크림, 바닐라 아이스크림, 콩조림, 잭프루트, 바나나 포스터가 완벽히 하나 된 그 맛. 모든 것들은 저마다의 특징을 잃어버리고 하나의 맛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모두 어디로 간 것인가?
(Where did everybody go?)
전멸이다. 그 한가지 맛을 위해 다 죽고 없다. 이런 거면 아예 대야에 다 때려 넣고 휘휘 잘 저어서 바가지로 퍼 주면 안되나? 아무래도 이게 아닌 것 같은데. 그 한 번의 참패 후에 알았다. 이건 그냥 그대로 살포시 떠먹는 거였다. 그런 규칙을 누가 정해 주진 않았지만 1,000개도 넘는 할로할로를 온갖 방법으로 먹어 본 결과 이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할로할로라는 그 이름 자체가 잘못이다. 그게 아니면 이름에 낚여서 낭패 보고 알아서들 깨달으라는 할로할로 창시자의 심계라고 내 멋대로 정신승리하기로 했다.
할로할로의 빛바랜 기억을 뒤로하고 집 앞 카페에서 만난 것은 애플망고 빙수이다. 보리를 튀긴 우리가 아는 그 과자, 망고잼, 연유가 같이 나온다. 넘쳐흐르고 뭔가 탁해지는 느낌이 싫어 일단 옆으로 밀어 놓는다. 부비트랩을 해체하듯 애플망고 한 조각을 살짝 들어낸다. 벽돌이 있던 곳에 드러난 흰 눈을 조심스레 긁어낸다.
보통은 빙수가 나오자마자 같이 먹는 이가 허무하게 섞어 버리고 '어어, 잠깐만...' 할 틈도 없다. 이건 빙수가 아니라 얼린 팥죽이잖아. 티 안 나게 빈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뺐다 한다. 자꾸 이러니 어느 때부턴지 빙수는 누구와도 함께 먹지 않는 게 나름의 룰이 됐다. 함께 먹을 이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졌을 때만 예외다. 서로 반대쪽에서 조심조심 터널을 판다.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진다. 얼음 속에서 두 개의 숟가락이 만난다. 쪽.
됐어. 이젠 무너져 내려도 괜찮아.
터널 속으로 따스한 바람이 흐른다. 할로할로였다면 바람만 지나다니지 않았겠지. 이건? 한치회가 아니고 코코넛 속을 파낸 거야. 이건? 잭프루트라는 열대과일인데 호불호가 좀 있어. 이건? 뜬금없이 콩조림. 의외로 나쁘지 않지? 이건...
잠깐. 우리 내기해요.
무슨?
이대로 한 입씩 떠먹다 무너뜨리는 쪽이 지는 걸로.
지는 쪽은 어떻게 되는데요?
지면...
모든 음식을 그렇게 먹진 않는다. 오히려 반드시 뒤집어 섞어야만 하는 음식도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비빔밥이다. 한식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은 비비적 비비적 뒤섞는 걸 당혹스러워하지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암만 먹어 봐도 비빔밥은 비비적 비비적이 맞는 듯하다. 섞여서 단일한 맛 속으로 모든 게 사라지는 게 아니고 아무리 섞어도 5가지 재료면 5가지, 10가지면 10가지의 맛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이러니 빙수를 보면 조건반사처럼 뒤집어엎고 그 난리를 피웠던 거구나. 흰 것 위에 희지 않은 것이 얹혀 있기만 하면 배비작 배비작 해야만 직성이 풀렸고 어딘가 희멀건 부분이 있으면 인생이 대단히 잘못된 느낌이 들곤 했지. 그런 식으로 학습되어선 빙수도 할로할로도 참패했고, 다들 어디로 갔는지는커녕 여기 들어간 게 뭐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함께 함께'를 외치는 우리 세상도 비빔밥만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발길 닿는 곳마다 외치는 함께란 빙수의 섞임일까, 비빔밥의 어울림일까. 모두들 홀연 사라지고 한 가지 맛과 색깔만 남는 거, 이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 그건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누군가가 확 섞어버린 팥빙수이고, 내가 잘못해서 그만 개밥을 만들어 버린 그 할로할로 아니었는가.
다들 어디에 계신가요?
(Where did everybody go?)
어쨌거나 비빔밥은 죽도록 비벼야 제맛이지. 암만 비벼도 콩나물은 콩나물이고, 버섯은 버섯이며, 고사리는 고사리요, 도라지는 도라지다. 아무리 비비고 또 비벼도 들어간 재료만큼의 맛이다. 얼마든지 비벼도 괜찮다. 그러니 비비자. 죽어라 비비자. 어른도 비비고 아이도 비비고. 오늘도 비비고 내일도 비비고.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시계 방향으로 비비고 반시계 방향으로 비비고. 비비적 비비적 비비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