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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Vagabond May 27. 2019

그 골목에서 놓쳐버린 시간

 Wandering around the city


The first thing you see as you open your eyes

the last thing you say as you said your goodbye

theres something inside you thats' crying and driving you on

-"Something inside" by Jonathan Rhys Meyers, "August rush"中에서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 도시와 익숙해져 간다.


점차 일상이 되어간다. 여행을 할 때와는 달리, 처음 정착할 때와는 달리 우리는 신선함에 대한 감도가 낮아져만 간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에서 내가 익숙한 구역은 극히 일부분인데 말이다. 나에게 도시의 신선함은 버스킹으로 다가올 때가 많았다. 허우하이 바 스트릿에서 (后海酒吧街), 트레비 광장 앞에서 (Piazza di Trevi), 라이스터 스퀘어에서 (Leicester Square)의 선명한 기억들에는 모두 진심을 다해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가들이 첨부되어 있다.



EllisGraceWilson,  Leicester Square,  19:35, 2.28.2016



A girl at National Theater, Prague, 16:20, 4.22.2016



2007년은 특별한 한 해였다.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  “August Rush”, “Once” 등 음악을 주제로 한 영화들이 속속 개봉했던 해가 바로 2007년이다. 그 때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영화와 노래에 관심이 많았다. 물론 음악영화들도 개봉하는대로 다 챙겨보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또 어린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면서 즐겼다. 그리고 그 해 8월, 엄마와 북경으로 여행을 갔다가, 허우하이 옆 한 골목에서 들었던 Something inside (영화 August Rush의 OST 중 하나)는 내 인생 중 가장 진한 버스킹 기억이다. 그저 저녁식사후 엄마랑 호수 옆에서 산책하는 중이었다. 한 청년의 꾸밈없고 애절한 목소리, 군중 속에서 우리는 그 목소리에 다가갔다. 눈을 감고 기타를 느끼던 그  작은 체구, 자신의 나날들을 뱉어내는, 자유를 노래하는 그 목소리에 나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아직 한번도 그렇듯 뜨겁게, 자신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소녀는, 그 모습이 너무 멋지고 부러웠다. 집에 돌아가서 나는 August Rush를 다시 한번 보고 Something inside를 mp3에 담아뒀다. 스마트 폰이 없는 시절이었다. 나에게 북경에 대한 가장 진한 기억은 그 청년의 목소리이다. “Something inside you that’s crying and driving you on"


내가 익숙해져버린 이 서울은 흐릿한 파스텔톤의 기억밖에 없다. 알람을 듣고 일어나 출근을 하고, 야근 후 잠깐 집 청소를 하고, 유튜브와 넷플릭스에 시간을 조금 소비한 후 잠에 드는 하루.  늦잠을 실컷 자고 친구와 마라탕 한 그릇과 밀크티 한 잔을 즐기고 집에 돌아오는 주말. 자취하는 직장인의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는 흐릿한 파스텔 톤이다. 그러니 오늘이다. 지금이다. 지금이 아니면 서울은 어쩌면, 평생 나에게 명도 낮고 채도 낮은, 무슨 색인지도 불분명한 파스텔 톤으로 남을 것 같다.


어떤 일은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도 경험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나의 일상을 움직여보자.


항상 생각은 열기구만큼 큰데 실천은 물풍선만큼도 못하는 여행계획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하루는  시간을 내어 “여행"을 해보자. 오래전엔 숲이었을 그 도심으로. 오늘은 내가 사는 도시에서 버스킹을 찾아가는 것이 포인트라고 설정해본다. 오늘이 쉬는 날이라면 침대를 벗어나서, 오늘이 출근 날이라면 퇴근 후 지하철을 타고 삼청동 돌담길로 가본다. 내가 익숙해져버린 이 도시에 뜨거운 색을 덧칠해보기로 한다. 언젠가 놓쳐버리고 말았던 그 시간, 그 골목으로 가서 빨간색이든 노란색이든 칠하고 돌아와보자. 마치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에 처음 방문한 것처럼, 골목에서 골목으로 부유하고, 그 속에 만연한 예술가의 영혼을 찾아 떠나보기로 한다.


3년 전, 교환학생으로 해외에 갔었다. 영국의 봄은 흐렸다가 젖었다가  밝았다가 아주 정신없는 하루하루였다. 어느 날, 은행 일을 보고 나오다가 타향살이의 서러움에 북받치던 순간이 있었다. 그 때, 은행이 있는 학생회관 앞에서 보았던 스트릿 댄스 버스킹은 바람처럼 나의 서러움을 가르고 지나갔다. 순식간이었다. 스트릿 댄스를 워낙 좋아하는 지라 가서 기웃기웃거렸다. 말도 걸어보았다.


그들은 아스톤 대학 소속의 힙합 동아리이긴 하지만 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있는 Tolu가 연습실 대여 등을 해결해주고 있고 정작 연습에 나오고 있는 멤버들 중 대학생은 몇 명 되지 않고 근처에 사는 아이들, 어른들, 할아버지도 있었고 나랑 대화를 나누었던 나보다 3살 어린 흑인친구도 있었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오늘 은행, 비자 등등 여러 업무를 보고 외국인의 서러움에 빠지려는 찰나에 그 버스킹으로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고. 나는 그들의 앰프 앞 박스에 허리를 숙이고 2파운드를 넣고 그들과 인사했다. 그 친구와는 페이스북을 교환하여 나중에 Nottingham으로 배틀하러 갈 때 따라가서 구경하기도 했었다. 자작랩을 쓸 때 옆에서 들어주기도 하고 자메이카 음식점을 추천받아서 먹어보기도 했다. 나에게 버밍엄의 기억은 그 친구의 폴로티처럼 쨍한 보라색이다.


3년이 흘렀지만 정말 가끔 그 버스킹이 생각난다. 그 때 식스스텝을 하려다 계속 넘어져서 속상해하던 그 꼬마는 이제 춤 엄청 잘 추겠지, 나에게 친절하게 다가와서 말을 걸어주던 흑인친구들은 어떤 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지금도 자유롭고 아름답게 웃으면서 나같은 사람에게 위로를 건네고 있는지.


지금 한창 5G가 보편화되고 있는 시대에, 듣고 싶은 노래, 보고 싶은 공연, 온라인에서 검색하면 못 찾을 것이 없다. 하지만 길을 걷다가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와 선율만큼 가슴 속에 박히기엔 쉽지 않다. 노래하는 사람이 바로 앞에 있어서일까. 그 목소리에 담긴 고뇌와 좌절, 행복과 흥분, 의지와 꿈이 더 촉촉하게 다가와서일까.


또 파리의 한 지하철 역에서는 버스커 앞에 서서, 미친듯이 펑펑 눈물을 흘리는 소녀를 본 적도 있다. 노래하던 버스커들은 그 소녀에게 말은 거는 대신 묵묵하게 자신들의 노래와 연주를 해나갈 뿐이었다. 그 소녀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현금 한다발을 꺼내더니 몇 유로 남기고 모두 기타케이스에 넣고 그 자리를 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지켜보았다.


뭔가 오늘따라 유랑민이 되어 익숙하지 않은 서울을 찾아가고 싶다. 버스커를 만나 그 온도를 나누고 싶다. 내가 놓쳐버린 그 시간의 서울에 가서 선명한 색칠을 하고 돌아오고 싶다.


오늘이 아니면 어쩌면 평생 다시 하지 않을 소소한 생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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