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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훈 Nov 05. 2019

공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

[공의 인문학] 문제는 공이 아니고, 공을 주고받는 사람이야

가을의 여운을 즐기기에 좋은 때다. 돌아보면 놀고먹고 즐길 것 천지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릴 적부터 즐겨온 공놀이를 놓지 않는다. 우리에게 공, 그리고 공놀이란 어떤 의미일까?




사냥에서 자본주의까지, 공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다.


야구, 축구, 농구, 골프, 테니스 등. 스포츠의 대부분은 공으로 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 자체를 즐기기도 하지만, 선수 하나하나의 전적을 평가하며 나름 지식의 향연을 펼치는 것도 즐겨한다. 그런데, 그렇게 열을 올리는 공놀이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인류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존 폭스 John Fox는 그의 저서 <더 볼 The Ball>에서 이렇게 말한다. 공은 “협동이나 경쟁을 촉발하는 사회적인 도구이며, 공놀이의 진화도 건강과 사회화, 두뇌 발달에 도움을 주었다"라고.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인기 사진공유 SNS 인스타그램에서 ‘#공’이라고 검색해보면, 공을 가지고 즐겁게 노는 아이들도 있고, 야구, 축구, 골프 등 다양한 공놀이를 하는 어른들도 있지만, 역시 대세는 개의 공놀이 사진이다. 유독 사람과 개는 공놀이를 즐긴다. 그 근본을 찾아보면, ‘사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적정한 거리에서 돌멩이를 던져 사냥하던 인간, 그리고 인간의 사냥을 돕던 개의 오래된 습성이 DNA로 남아 사냥본능으로 꿈틀거리는 것이다.


인간 사회가 문명화되며 사냥은 일상이 아닌 특정 행위로 남게 되고, 일상의 자리는 공놀이가 대신하게 된다. 부족의 의식에서 시작되었든, 아이들의 놀이가 발전되었든 공놀이는 보다 전문화되어 간다. 공놀이가 프로스포츠화 된 것은 고대 올림피아 제전시대의 투창과 원반던지기를 시작으로 볼 수도 있지만, 프로스포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점을 맞는다. 단순한 놀이를 넘어 이데올로기로써 작용하기도 하고, 소비사회를 위한 기재로서 작용하기도 하면서.

 


공으로 싸우고, 공으로 화해하고


존 폭스에 따르면, 고대 스코틀랜드 오크니 제도의 커크월은 어떤 폭군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어느 날 한 젊은이가 그의 머리를 베어 가져왔다고 한다. 마을에 다다를 무렵, 그 젊은이는 탈진했고 마을로 폭군의 머리를 힘껏 찼는데, 군중들이 폭군의 머리를 발로 차며 거리를 누볐다고 한다. 다소 황당한 이야기지만, 이것이 축구의 기원이라고 한다. 후에 머리는 가죽으로 된 공으로 바뀌었지만, 폭군에 대한 증오와 한은 경기에서 그대로 표출됐다. 그 과격함에 선수 부상은 물론 건물까지 부서졌다고 한다.


이러한 광적인 모습들은 오늘날 지역감정이나 종교갈등과 뒤섞이며 경기장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1937년 발발한 스페인 내전으로부터 앙숙이 된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19세기 산업화 과정에 앙숙이 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의 경기에서 볼 수 있는 폭력성과 집단주의는 과히 상상을 초월한다. 1969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사이에 벌어진 5일간의 전쟁은 축구가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탁구를 통해 미국과 중국의 수교를 튼 스포츠외교, 이름하여 핑퐁외교 ping-pong diplomacy도 있다. 1950년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북한에 군사적 지원을 하였다는 이유로, 미국은 중국을 침략국으로 규정하고 국제사회에서 중국을 고립시키는 외교정책을 채택하였으나, 당시 미국의 닉슨 행정부와 중국의 최고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은 소련의 견제를 위해 전략적 제휴를 하기에 이른다. 그 마중물 역할을 탁구가 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 편을 갈라 공으로 싸우기도 하지만, 공으로 화해하기도 한다. 오래전 원시 인류가 서로를 향해 돌을 던지며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을 하기도 하고, 이후 돼지 방광으로 만든 공으로 놀이를 하며 서로 교감하고 즐긴 것처럼, 어쩌면 공놀이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와 만난 공놀이가 그 프로페셔널리즘 때문에 대중의 소외를 가져왔지만,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에서의 공놀이가 순수를 외치면 사람들은 그 순수를 쫓게 되는 것은 아마 공놀이와 인간과의 오랜 공감대 때문일 것이다.



공놀이의 기술 대신 공놀이의 본질을 되새겨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우리에게 공, 그리고 공놀이의 의미는 무엇일까? 인간이라는 말속에 답이 있지 않을까? 인간(人間)은 ‘사람 사이’다. 사람 사이의 본질은 무언가 끊임없이 주고받는 것일 것이다. 주고받는 행위의 매개체 중 하나가 공이니, 공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도구이며, 공놀이를 통해 협동하기도 경쟁하기도 하니 공놀이의 본질은 관계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지금 공놀이의 본질은 바뀐듯하다. 스포츠(혹은 스포츠산업)라는 이름으로 공놀이는 과학과 승부에만 집착한다. 축구의 꽃은 역시 월드컵이라 할 수 있는데, 월드컵의 핵심은 ‘아디다스 공인구’라는 과학, 몇 명의 ‘스타플레이어들의 승부’로 압축할 수 있다. 공놀이의 관계 대신 공놀이의 기술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공과 공놀이에 대하여 이야기하다 보니, 생각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지금 대한민국의 소통으로 이어진다.


공놀이는 주고받는데, 대한민국의 담론은 일방적이다. 공이 튀는 것은 응축된 에너지가 반발력으로 작용하는 것인데, 대한민국의 소통은 반발심만 있다. 공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지만, 기술적으로 공이 어디로 튈지 완벽히 통제하는 날이 올 것 같다. 하지만 공을 누구와 어떻게 주고받을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공놀이는 단순히 운동 이상의 의미를 가지긴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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