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이 얽힌 실타래 같은 인생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삶은 실타래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거대하게 엉킨 엉망진창의 실뭉치. 얇거나 굵거나, 거칠거나 부드럽거나, 제각기 다른 결을 지닌 실들이 뒤엉켜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는 것.
어느 날은 부드럽고 손쉽게 풀렸다가, 다른 날은 지독하게도 꼬였다가, 뒤틀린 맘처럼 그렇게 손쓸 틈도 없이 얽힌 실들을 과감히 잘라내기도 하는 것.
한편, 인생이란 이만큼이나 모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 것과 같다. 어쩌면, 이미 알고있는 줄 알았던 것들이 모두 미지였음을 뒤늦게 마주하는 순간들의 모음인 것이다.
모든 인간이 독립적인 한 줄의 실이라면, 그 실에 얽히고설킨 또 다른 실들은 전생에 풀지 못한 '인연'일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관조적이고 염세적인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한데 이 낡은 생각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는 느낌이다. 한편, 『은중과 상연』을 다 보고 난 뒤, 더욱 분명해졌다.
은중과 상연, 다소 중성적인 느낌이 풍기는 이름 두 개. 마치 내가 몰랐던 서로 반대의 뜻을 지닌 단어와 단어의 조합인 줄 알았다. 메인 제목 위 짧은 슬로건 같은 부제는 '선망과 원망 사이'
선망이 은중이라면 원망은 상연이고, 원망이 은중이라면 선망은 상연이다. 선망과 원망이 같은 자리에서 피어날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동경과 질투, 애정과 증오. 사랑과 미움은 한 끗 차이라고 했던가. 애정이 깊을수록 상처도 크고, 관계가 틀어지면 금세 미움으로 바뀌곤 한다. 앞서 손을 잡은 자가 먼저 등을 돌린다고 한다. 가까울수록 배신은 더 날카롭고, 등 뒤의 칼은 언제나 더 가까운 곳에서 다가온다.
위선과 위악이 한 몸인 것처럼. 결국 사랑과 배신은 서로를 증명하며, 한 덩어리처럼 얽혀 있다. 『은중과 상연』은 앞서 나열한 표현들의 모든 것을 선연하게, 온전하고 여실하게 드러내는 드라마다. 본격적인 퀴어는 없지만, 퀴어의 그림자를 한.
미숙하던 시절 처음 만나 서로를 선망했고, 때론 원망하며 자라온 두 사람. 어쩌면 악연이자, 동시에 생에 꼭 거쳐야 할 필연적 인연이었다. 단순히 우정이란 단어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차라리 동성이었기에 견딜 수 있었던, 첫사랑보다 앞선 깊은 애정이었으며, 동시에 가장 아픈 절교였다.
동성의 절교란, 한때 서로를 전부로 여겼던 기억을 억지로, 끝끝내 찢어내는 일. 사소한 비밀까지 공유했던 친밀함이 한순간 낯섦으로 바뀔 때, 좋았던 친구가 지나가던 타인보다 더 못한 사이로 변할 때. 그 상실감은 사랑의 끝보다 더 깊고 사무치다.
그래서 상연이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감히 은중에게 찾아가 생의 마지막을, 자신의 죽음을 동행해달라고 무릎 꿇고 부탁했을 때, 그 부탁이 몹시 이해됐고, 또 깊이 절감되었다.
은중과 상연의 인물을 논하기 전, 상연의 엄마 윤현숙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윤현숙의 가부장적이고 품행이 낮은 남편 또한.
상연과 상학의 아빠인 그의 남편은 자기 방식만이 옳다고 강요하는 이기적인 남자였다.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아들 상학을 끝끝내 이해하지 않았고, 훈육과 체벌을 멈추지 않았다.
현숙은 그런 아들이 안쓰럽다가도 다른 집 아들처럼만 자라주기를 바랐을 것이고, 그래서 딸 상연에게서 보이는 모난 기질이 남편과 닮아 보여 더욱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상연과 달리 아들 상학을 닮은 온순한 은중이에게 더 끌렸으리라.
은중이 아버지 없이 자라온 것도 현숙의 마음을 이끌게 한 요인이기도 했다. 현숙 또한 아버지 없이 자라왔으니까.
그런 은중이가 자신의 딸 상연과 함께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라고, 한편으론 안심했을 것이다. 남편을 닮아 마음이 쓰이던 딸이랑 좋은 친구가 되어주길 바라며, 현숙은 아들을 시켜 두 아이가 자연스럽게 더 가까워지도록 과외 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상연의 엄마 현숙은 은중이를 늘 가여워했다. 집안 사정도 알고 있었고, 또래보다 일찍 철이 든 듯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래서 은중이를 대할 때는 한결 더 따뜻했고, 그 애정은 상연의 눈에는 편애로 비칠 만큼 뚜렷했다.
물론 현숙의 직업은 선생이었고, 선생에게는 제자를 아껴야 할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상연에게 그런 사정은 닿지 않았다.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고, 무엇보다 사랑이 늘 오빠에게만 기울어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겐 부족함으로 남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 천상학이 산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춘기 시절의 동생이 흔히 그러하듯, 상연은 오빠의 일기장을 몰래 들춰보다 낯선 여자의 사진과 ‘M’이라 지칭된 인물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오빠의 짝사랑이라 추측해 엄마에게 먼저 알린 것도 상연이었다. 그래서 상연은 그 일이 오빠의 죽음에 한몫한 것은 아닐까, 평생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을 품고 살았다.
그런데 죽기 전 오빠가 자신이 아끼던 카메라를 은중에게 주었다는 사실, 은중에게 사진을 가르치고 함께 찍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상연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은중이 자신에게서 엄마의 사랑을 빼앗아 간 것도 모자라, 오빠의 마지막까지 가져가 버린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 그렇게나 가까웠음에도 이사 가는 날조차 인사 없이 떠났는지도 모른다.
오빠의 죽음 이후로 상연이 엄마 윤현숙에게 품은 마음은, 끝내 사랑을 갈구하다 제멋대로 뒤틀린 아이의 마음처럼 날카롭고 뾰족하기만 했다.
누군가의 가슴에 못을 박고 나서, 그대로 자신이 망가져버리거나 죽어버리면, 어쩌면 상대방은 그 못은 영영 빼지 못할 것이다. 상연은 그 못을 박아두고 자신의 이름이 박힌 채로 남아 있기를 바랐다. 영원히 자신을 기억하도록. 가슴에 묻고 후회하도록. 내가 박았던 못처럼 그 누군가가 영원히 괴로웠으면 하는 마음으로. 어쩌면 자신의 오빠처럼.
오빠도 그랬는데 나라고 못 해? 하는 삐뚤어지고 모난 마음으로.
은중과 함께할수록 상연은 좋은 듯하면서 한편으론 괴로웠고, 모두가 좋아하는 은중을 오롯이 좋아할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그럼에도 은중은 상연을 ‘더없이 친한 친구’라 불렀다. 상연은 그 무심한 친밀함을 견디지 못했다. 은중의 무해한 마음은 자꾸만 상연을 작아지게 했고, 그럴수록 미움이 모순처럼 교차했다.
오빠의 알 수 없는 죽음에 가까이 있던 인물, 운명처럼 오빠와 같은 이름을 가진 김상학, 그리고 채팅 속 닉네임 ‘오멩달’. 그 사실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 건 상연이었고, 그는 몰래 흠모하며 열렬히 뒤를 쫓았다. 그런데 그 상학이 은중의 남자친구라니. 에
상연은 끝내 자존심을 굽혀 은중에게 양보까지는 바라지 않으니 제발 만나지만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상연은 결국 은중의 기획안을 빼앗아 자신의 영화사를 세우고, 두 사람은 등을 돌린 채 완전한 절교에 이른다.
이젠, 은중의 마음으로 넘어가보자.
가진 거 없고 반지하 단칸방에서 가난했고, 그럼에도 성정이 너른 덕에 아무것도 해가 되지 않았다.
어린 은중은 엄마의 우유 배달을 종종 거들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난생처음 아파트라는 곳에 들어가 보았다. 정갈한 살림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화장실이 두 개나 있는 집. 은중이네 형편으로는 도저히 꿈꿀 수도 없는 공간. 엄마가 배달 구역을 따내기 위해 경비실에 들러 웃음을 건네고, 빈집 청소까지 도우며 눈도장을 찍은 덕분에 은중이 겨우 한번 들어가본 곳.
그런 곳에 사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공부도 잘하고 반장까지 맡은 전학생, 상연의 집이었다. 상연에게는 은중에게 없는 아빠가 있었고, 또 아빠 없는 자신을 눈물로 위로해주던 선생님 같은 엄마가 있었다. 그리고 그 집에는 상연의 오빠, 천상학이 있었다. 은중이 우연히 상연의 집에서 마주한 그 오빠는, 그의 첫사랑이 되었다.
그리고 대학 사진 동아리에서 은중은 뜻밖에도 다시 상연을 만났다. 어린 시절 이후 멀어졌던 두 사람이 캠퍼스에서 재회한 것이다. 살림이 나아지고 형편이 조금씩 안정되어 웃음을 되찾은 자신과 달리, 상연의 삶은 오히려 더 가난해지고 각박해진 듯 보였다.
어릴 적 자신이 살던 남루한 반지하 방을 떠올리게 하는 단칸방에서, 상연은 의외로 환하게 웃으며 은중을 맞아주었다. 낡은 프라이팬에 정성껏 볶아낸 멸치를 내밀며, '맛 좀 보라'며 젓가락을 건네는 모습은 그 시절과 다름없이 씩씩하고 따뜻했다.
은중은 내심 걱정했었다. 어린 시절부터 고고했던 그 마음이, 고단한 현실 앞에서 혹여 힘들지 않을까. 그러나 눈앞의 상연은 달랐다. 힘든 살림살이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세상에 맞서는 듯 차분하고 묵묵했다. 그 모습이 오히려 다행스럽고, 또 놀라울 만큼 눈부셔 보였다.
은중은 상연이 참 좋았다. 유년 시절을 함께했고, 많을 것을 나눴고, 성인이 되고 나서 또 이렇게 우연히도 필연처럼 마주쳐서 다시 이어진 이 인연이 참 소중했다.
어쩌면 남자친구 상학보다 더 상연이가 좋았던 것도 같다. 상연이가 남자라면 상학이가 아닌 상연이랑 더 먼저 사귀었을지도 모른다. 함께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시간은 언제나 즐거웠고, 캄캄한 암실 속에서 한 장의 사진을 수십 번이나 집요하게 인화하며 끝내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모습은, 참 상연다웠고 멋졌다.
한편, 멋지게 해내는 결과물을 보면서 자신답지 않게 질투가 샘솟기도 했다.
언제나 뭐든지 뚝딱 잘해내는 상연이, 멋지고 부러워서 가끔 스스로 못나서 열등감이 느껴지게 하는 내 친구, 그래서 자신을 더 성장시키는 원동력 같은 상연이.
상연은 은중에게 질투와 동경, 열등감과 애정을 한 몸에 안겨주는, 유일한 친구였다.
언제나 객관적이고, 원칙주의자에 결과만을 쫓는 상연이. 과정이나 정서에는 큰 관심이 없었기에, 은중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부딪히고 날 선 의견 대립을 벌이곤 했다.
파랑의 기원.
은중이 구상했던 청춘 멜로 작품을 상연은 빼앗아 자신의 영화사의 첫 작품으로 내놓았다. 상연이 차갑게 내민 계약서 앞에서 은중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종이를 찢어버렸다. 계약도, 돈도, 그런 알량한 합의 같은 보상 없으니, 차라리 끝까지 나쁜 년으로 남으라는 듯이.
동경과 질투, 그리고 애증이 스무 살을 지나 서른을 채우며 두 사람을 갉아먹었고, 결국 돌이킬 수 없이 멀어졌다.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관계는 끊어졌고, 이제 마흔셋. 은중에게서 빼앗은 작품으로 유명한 감독이 된 상연이 영화제 시상식에서 은중을 언급하며, 은중에게 연락해 두 사람은 마침내 다시 마주 앉게 된다. 시간이 흘러도 풀리지 않은 감정 탓에, 이 만남은 껄끄럽고 불편하기만 했다. 그런데 상연이 돌연, 스위스로 함께 가달라는 뜻밖의 부탁을 꺼낸다.
안락사, 조력사, 뭐 그런 거. 죽음을 앞둔 마지막 동행.
'너는 진짜 끝까지 이기적이구나. 여전히 너답다.'
은중의 마음은 이랬으리라.
한때 누구보다 자존심 세고 고고하던 상연이, 어째서 그 어려운 마지막 부탁을 하필 자신에게 했을까. 그 질문이 은중의 가슴에 오래 남았다. 그는 상연과 나누었던 분명하면서도 이미 케케묵어버린 추억과 기억들을 하나하나 뒤집어보며, 글로써 다시 풀어내기 시작한다.
둘은 뒤늦게 조우해, 죽음을 앞에 둔 자리에서 그동안의 마음들을 느리게, 그리고 길게 나누었다. 말기 암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던 상연. 그러나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평생 지고 살아온 긴 죄책감이었다. 그 고백을 들으며 은중의 마음은 쓰라렸다.
결국 은중은 상연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고, 함께 스위스로 향했다. 마지막 여정을 함께한다는 사실이 순간순간 소중하게 다가왔지만, 이별 아니, 죽음 앞에서 담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꿋꿋해 보이는 상연과 달리, 무너져내린 것은 은중의 마음이었다.
단 1%의 가망만 있어도 삶을 포기하지 않았을 상연이, 오빠와 엄마를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상연이. 상연은 말한다. 고통스러운 죽음을 감내했던 자신의 오빠와 엄마도 자신처럼 이렇게 스위스에 손잡고 가서 좀 더 안락한 죽음을 맞이하게 하고 싶었다고. 모질지 않은 이가 모진 마음을 끝끝내 품고 사느라 천벌을 받은것 같다는 상연이의 말이 비수처럼 꽂힌다. 누가 너를 끝내 받아주겠냐는 자신의 마지막 비수도 이렇게나 선명했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
하필이면, 스위스의 문은 왜 파랑인 걸까. 은중의 상연의 손을 꼭 잡는다. 의연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안락사의 레버를 당기는 상연의 맞은편에서, 잠에 취해 죽음으로 스러져가는 상연의 이마를 마지막으로 짚으며 은중은 속삭였다.
'고생했어 상연아. 잘 가. 다시 만나 우리.'
삶은 언제나 모순과 이율배반으로 짜여 있었다. 선망과 원망이 한자리에 피어나고, 애정과 증오가 한 몸처럼 얽히듯, 은중과 상연의 시간 또한 그렇게 꼬이고 풀리기를 반복했다.
때로는 동경이었고, 때로는 질투였으며, 끝내는 죽음마저도 함께 걸어가야 했던 인연이었다. 누군가의 삶에 박힌 못처럼 아프고 날카로운 기억일지라도, 그 상처가 곧 존재의 증거가 되듯이.
『은중과 상연』은 우리에게 묻는다. 사랑과 미움, 선망과 원망, 그 모든 모순이 얽힌 실타래 같은 인생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끝내 붙잡고 기억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