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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렌콩 Aug 02. 2018

마른 멸치와 부드러운 무화과

  오랜만에 엄마와 함께 거실에 앉아 멸치를 다듬는다. 마른 멸치는 딱딱하면서도 적당한 수분을 머금으며 비릿하면서도 짭조름한 냄새를 풍긴다. 멸치 속 검은 똥과 뼈를 발라서 분리하는 단순한 일인데, 오래 앉아서 멸치들을 들여다 보느라 목이 아프다. 멸치의 얇고 조밀한, 하지만 어느것보다도 더 섬세한 뼈들은 뾰족하면서도 부드럽다. 멸치를 겨우 한움큼 다듬었을 때, 엄지손가락 어딘가에 멸치 뼈가 박힌 것처럼 욱씬욱씬 하다. 두툼한 멸치는 멸치가 아니라 작은 생선 같아서, 살만큼이나 두툼한 똥을 꺼내기 매우 편해서 큰 것들만 죄다 모아 잽싸게 다듬어버린다. 그 아래 작고  얇아서 마치 바늘같은 멸치들 위로 부스러진 똥과 해체된 뼛조각들이 소복하게 쌓인다. 작은 것들은 더 딱딱하여 똥과 머리를 다듬고 나면 한줌도 남지 않는다. 그럼 마땅히 이행 하고 있는 노동의 실용성이 부정당한 느낌이라서 마음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 

  그래도 생선처럼 두툼한 멸치들 사이에서 이, 작고 작은 멸치들도 잘 말려서 우리집, 결국 내 무릎 앞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래서 한마리도 허투루 다듬지 않을 수가 없다. '강한 햇볕에 말려지는 멸치들이 제각기 스스로 머리와 검은 똥과 뼛조각들을 스멀스멀 밀어낸다면 인간이 이런 수고스러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될텐데.' 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품다가 문득 한켠에 수북히 쌓인 머리와 검은 똥과 뼈조각들을 바라본다. 반찬으로 먹고 국물로 우려낼 몸뚱어리는 깨끗하게 발라져서 그 머릿무덤 옆에 수북하게 쌓여있다. 멸치의 하얀 눈들이 잘린 제 몸뚱어리들을 바라보는 것 같아서 괜시리 미안해진다.

  멸치를 다듬으며 엄마가 사온 무화과를 먹는다. 뽀득뽀득,깨끗하게 씻어온 무화과 몇 알. 연두와 붉은색이 고인 부드러운 껍질을 한겹씩 벗겨내리면서 그 생기다만 듯한 다홍빛 속살을 한입 한입 머금는다. 아주 잘 익어서 붉다 못해 검붉은 무화과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쪼글쪼글 말려진 건자두 (푸룬), 건포도처럼 말린 무화과를 본 적도 있다. 

  무화과라는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을 읊조리면 중학교 시절, 친한 친구의 이야기가 저절로 떠오른다. 그 아이는 우리집 아랫 골목에 살았는데, 무화과를 좋아했고 자주 먹었다. 어린 시절 줄곧 프랑스에서 살다 와서 부드러우면서 우아한 불어를 잘 하던 친구였다. 장난끼가 많고, 여자친구보다도 남자친구들이 더 많았던 그 애 입속에서 흘러나오는 유창한 불어는 어린 마음에도 고혹스러웠고, 또 아주아주 고급스러웠다. '봉쥬르, 쥬배 비앙,에뚜왈.' 혀가 간드러지는 고급진 단어들을 구사하던 그 애 입 속에서 처음 들었던 무화과. 때문에 그때 처음 들었던 무화과라는 과일은 중국 어딘가에서 산삼과 같은 취급을 받는 귀한 음식처럼 느껴졌으며, 도복을 입은 옛날 사내들의 어깨 언저리에 앉아있는 애완용 원숭이의 이름 같기도 했다. 

  그 애는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엄마와 함께 살았지만, 그 애의 엄마는 중학생인 딸의 큰언니라고 오해 받을 정도로 젊고 감각적인 분이셨다. 때문에 손에 물을 묻히며 집안일을 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그 애의 집에는 늘 가정부 아줌마가 그 애의 옷을 빨아주고 그 애에게 밥상을 차려주었다. 비록 이혼은 했지만 딸을 살뜰하게 챙기던 아버지가 철마다 택배로 보내주던 붉은 무화과들. 그 애가 자주 자주 맛있게 먹었는데 가끔식 무화과가 몇알 씩 사라졌다. 그 애는 자연스럽게 가정부 아줌마를 의심했다. 아줌마한테 훔쳐갔느냐고 물었더니 불같이 화를 내더랬다. '아줌마, 차라리 거짓말을 하지 말고 함께 먹어요' 라고 그 애가 말했던가. 그건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느 새벽 부엌 탁자에 서서 무화과를 허겁지겁 베어 먹고 있던 가정부 아줌마의 뒷모습을 몰래 목격했었다고 털어 놓던 그 애의 서늘한 고백만 기억난다. 

  마른 멸치를 다듬으며 베어먹는 무화과, 과일살들이 멸치와 다르게 부드럽고, 또 아주 달다. 포근한 맛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익지 않은 껍질살이 입안 언딘가에 박혀있어서 덜 익은 감을 베어 먹은 것처럼 떫기만 하다. 그래서 나는 촉촉한 바다 수분이 베여있는 두툼한 멸치 한마리를 통째로 씹어 먹어 본다. 비릿하면서도 짭조름한 멸치 맛. 무화과의 달콤함과 한데 섞여 어우러지는 소금 간. 내 몸의 살과 뼈로 구성 되었을 다른 멸치들의 철분들.

  아까전 멸치뼈가 박힌 엄지손가락이 따끔따끔, 욱씬거린다. 엄지 손가락을 유심히 들여다 보면 뾰족한 불순물이나 가시같은 뼈는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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