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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렌콩 Aug 29. 2018

하여튼, 그 언저리에 있는 이백만원

 며칠전에, 누군가의 은밀한 이야기를 엿들었다. 곤란한 부탁과, 그 곤란한 부탁을 듣는 이의 난처한 표정을, 그 미세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그려내는듯한 묘한 목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사실 듣고 싶어서 들었던 건 결단코 아니었다.


  유동 인구가 많은, 강남의 큰 프랜차이즈 카페의 인테리어 상,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난간 하나를 두고 그들과 앉아야만 했다. 평일 저녁, 강남의 큰 카페는 지하는 물론 지상까지 꽉꽉 들어찼을 것이고, 자리는 내 옆의 빈 자리가 유일했을 것이었다. 건장한 체구의 남자 둘이 내 옆 자리에 착석했다. 서로를 마주본 채였다. 앞서 말했다시피 철제 난간을 사이에 둔 채였다. 사실상 표현만 난간이었지, 난간을 제외하면 4인석 자리에 동석하듯이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마주 앉은 남자 둘, 그 바로 옆에 내가 앉은 꼴이었으니 그 알량한 철제 난간이라도 없었으면 영락없이 어정쩡하고 이상한 모양새였다. 하고 있던 원고 작업이 있었고 한창 몰두하고 있던 찰나였기에 내 옆에 누가 앉듯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금일 계획했던 분량을 거의 다 마쳐갈 때 쯤, 잠시 숨을 돌려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남자 둘이 나와 꽤 가까운 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소하게 서로의 근황을 전하는 침묵 많은 그 대화들은 잠깐 보기에도 어색한 분위기가 저절로 흐르곤 했다. 다만 낮고 차분한 남자의 낯선 목소리가 가까운 거리에서 자꾸 귓속을 파고드니, 부러 긴 머리를 풀어헤친 채, 내 모니터에만 열중했다.


  사실 형을 이렇게 부르게 된 건, 제 개인적인 사정에 대한 것 때문이에요.


  차분한 그 목소리 중간엔, 분위기의 맥락과 저음의 톤과도 잘 어울릴 법한 단어와 문장 하나가 명확하게 꽂혔다. '개인적인','사정' 얼핏 관심이 고개를 들 즈음, 남자는 제 앞에 앉은 형에게 망설임 없이, 그러나 조심스러움을 집요하게 놓지 않은 채 그 묘한 할말을 이어갔다.


  돌려서 이야기 하지는 않을게요. 이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단도직입적으로, 형에게 돈을 빌리려고 이렇게 뵙자고 한 거였어요.



   그 어색하고 불편한 기류를 깨기 위해 남자는 꽤 무던히도 노력했다. 눈 앞의 대본을 천천히 읊는 것처럼 남자는 아주 차분하게, 몇 번을 연습한 것처럼 곤란한 그 부탁을 신속하게 내뱉었다. 아...남자의 말소리가 끝나자마자, 내적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무례할 수 있겠지만, 이미 나는 내 옆자리의 남자 둘에게 완전히 집중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집중을 어떻게든 중단하고 싶었지만 남자의 표현 말마따나 '단도직입적으로' 사정없이 내게 꽃힌 그 대화의 관심은 도저히 멈출 줄을 몰랐다. 나도 모르게 열린 귀를 애써 닫아보고자, 머리칼을 더 앞으로 떨어트렸지만 도리어 머리카락이 덮인 귀는 더욱 집요하게 그 비밀스런 대화를 귀 담고 있었다.


  남자가 말을 마치자, 그 맞은편의 남자는 당혹감이 섞인 감탄사를 천천히 흘렸다. 한편으론 그 곤란하고 불편한 부탁을 이미 예상한 듯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으레, 한번쯤은 겪는 일이라는 듯이 불가항력적이라는 뜻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어린 동생이 돈을 빌려달라는 곤란한 부탁을 들은 남자는 다짜고짜 빌려달라는 돈의 액수를 물었다. 그건 나도 너무너무너무나도 궁금했던 대목이었으므로 조용히 남자의 답변을 기다렸다. 평일 저녁, 강남의 카페에서 존댓말을 할 정도의 관계인 지인을 불러, 돈을 빌려달라는 남자의 '돈의 액수'는 도대체 얼마일까, 나는 옆 대화의 주인공 남자 둘만큼 긴장한 채 뒷부분의 대화를 기다렸다. 초조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절로 긴장이 되었다. 한편으론 흥미진진하기까지 했다. 아주 많이 무례했지만 그때는 정말 그 어떤 스릴러 소설의 말미보다도 더 궁금해졌다. 건장한 성인 남성 둘의 꽤 사적이고 비밀스런 어른의 대화였기에 아직은 한참 어린 내게 너무도 흥미로웠다. 오백? 천만원? 그도 아니면?



  ...이백만원이예요.



  결정적인 그 액수를 들은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조금은 적은 액수에 아주 희미하게 실망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서둘러 이백만원의 가치에 대해서 곰곰 생각해 본다. 일반 직장인들의 월 평균 급여, 혹은 그 급여에 조금 못 미칠 수 있거나, 그 급여보다 몇 십만원이 더 얹어질 수도 있는. 하여튼 그 언저리에 있는 이백만원.  백 만원이 총 두 번을 지나야 하는 그 이백만원, 누군가에게 아주 큰 돈일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말마따나 '껌값'의 돈일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귀 담아버린 그 은밀한 액수에 죄송스런 마음이 앞섰다. 한편으론 내가 먼저 마음속에 지레짐작한 오백 만원이나 천만원이 아니라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이 앞섰다. 나와 같은 마음이었던지, 동생의 이야기를 들은 남자는 조금 피식 웃었다. 곧 자신의 웃음을 무마하듯 서둘러 지워버린 채 이유를 물었다. 돈을 빌리는 명확한 이유에 대해서. 곧, 성급하게 '너가 이유를 설명해 줘도 빌려주지 못 할 수도 있어.'라는 말을 부록처럼 덧붙였다.

  둘은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 돈을 빌리려는 안타까운 사연에 대해서, 남자는 밀린 사업 자금을 갚아 나가려는 듯 보였다. 형에게 돈을 빌려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절절한 개연성과 연유를 겹겹이 덧붙였다. 그 곤란한 부탁을 직접 들은 맞은 편의 그 남자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이 자꾸 그 나무 테이블을 지나 내 앞까지 가차없이 지나가곤 했다.


  돈을 빌리려는 남자에 대한 까칠하고 차가운 조언은 왠지 자꾸 내 가슴을 콕콕 찔렀다. 진중하고 무거운 대화는 30분간 이어졌고, 어느틈엔가 뚝 잘려나가듯 속절없이 끊기고 말았다. 나는 남자가 이백만원을 빌려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여튼, 그 언저리에 있는 이백만원, 그 돈을 빌리고자 그 불편한 상황을 만들어야만 했던 그 씁쓰름한 분위기, 자꾸만 남자가 내뱉은 이백만원이라는 가치에 억지로 대입해보는 단 돈 이백만원어치의 사연과 환산된 그 무엇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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