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제 뭔가 도입부분의 퍼즐이 완성되고, 내가 계획 해 놓은 것들만 차근차근 이행하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푸집이 마련되었으니 그 틀에 맞추어 반죽을 부으면 된다. 좀더 단단하고 튼튼한 고형물로 굳어질 수 있도록.
2. 요즘 나는 '나'라는 이미지를 너무도 많이 소비한 것 같아서 이상한 자괴감을 느낀다. 애절함과 공격성을 묘하게 혼합시킨 표현들을 꾹꾹 담아 퇴고한 문장까지 보내고, 초조하게 답장을 기다리고, 버럭버럭 입을 더럽히며 욕하고, 이 더운 날에 이 일련의 감정소비로 인해 '나'라는 주체를 잃은 듯하여 마음이 복잡하게 엉켜버렸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나는 무얼 하고 있는가, 나는 왜 낼 필요도 없는 분노를 내뿜며 내 아까운 감정을 불태우는가.
3. 그 약속이 온전히 지켜질지는 미지수이다. 너무 지긋지긋하다. 얼른 이 지저분한 행보를 깔끔히 매듭 지을 수 있기를.
5. 새로운 주제를 찾거나 이미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소재에서 관점을 달리하거나 시선을 비틀거나 내부에 고여있는 잠재적인 감정들을 이끌어 내면서, 평소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시선으로 주도면밀하게 관찰했던 모든 것들을 적당한 비율로 점철시키며 접목시키며 한줄 한줄, 퇴고하는 과정인데.
9. 사실 이건 아주 그럴싸한 핑계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근원적으로 잘 맞을 수 있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13. 그 외에도 그 저변에 고여있는건 원초적인 우울과 슬픔이다. 그런 것들은 감히 내가 설명할 수도, 형언 할 수도 없다. 내가 그 아이의 글을 읽고 감탄하는 것들은 대개 질서정연하고 논리적인 문장들과 표현들이다. 그 문장들을 읽을 때 마다 마치 명료하게 맞아 떨어지는 퍼즐을 하나씩 끼워 맞추는 느낌에 사로 잡힌다. 친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런 매력에 빠져들었다는 걸로 입증할 수는 없다. 그 인물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가 없었어도 그 아이의 글을 읽고 있으면 기묘한 뭔가에 설득 당한다. 그건 아주아주 좋은 재주인 것 같다.
15. 넬의 '3인칭의 필요성'을 오랜만에 들었다. 흑백 뮤비 속, 눈물짓는 려원이 너무너무 예쁘고 가녀리다. 잔 속에 담긴 물 안에서 퍼지는 잉크가 꽃같다. 이리저리 뒤엉키는 부드러운 곡선들, 굴곡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