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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lerie Lee Apr 30. 2022

배우 도전 일기#1

성공하란 보장은 없으나 실패는 절대 못한다.

앞으로의 글은 30대 늦깎이 배우 지망생의 일기장처럼 진행됩니다. 기획된 연재가 아니라 의식의 흐름처럼, 일기장처럼 연재됩니다.


Entry#1: 2022 4월 마지막 날의 일기.

4월 7일부터, 나는 약 100일간 배우의 꿈에 마지막으로 도전하기로 했다. 일단 이 도전의 성공과 실패 기준은 "상업 드라마/영화에 주조연 이상으로 캐스팅" 또는 "괜찮은 소속사와 계약" 으로 잡기로 했다.


 오늘은 4월 30일.

그리고 엔터 오디션에서 3번째 낙방을 한 날이다.


1. 그래, 난 못 하는 거다. 그래야만 한다.


리 스트라스버그에서 유명한 선생님들한테 칭찬받고, 엔와유 연기 선생님도 극찬해주고, 학원 선생님도 잘한다고 해서.. 그런 줄 알고 오디션을 봤는데 오디션 장에서는 막상 교실에서 1/10도 못하고 돌아왔다.


이번이 세 번째다. 소년심판에서 나오는 피해자 어머니의 독백. 개인적으로 정말 이입이 잘 되고 나 스스로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연습도 했고 검증도 받았는데 왜 오디션 장에서는 몰입이 안될까.


현장에서는 그래도 몇 테이크 씩 하면서 워밍업하고 분명 3번째 테이크에서는 잘하겠지. 그런데 오디션은 테이크가 없다.


선생님은 연기가 기호 식품이라고 하셨다. 이 사람 보기엔 잘해도 저 사람 보기에는 별로일 수 있다고. 그 말에 나는 센 척을 하고 싶었는지 이렇게 맞받아 쳤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 더 정확하게 말했겠죠 뭐."


처음 보는 사람은 가장 냉철하고 솔직하고 보편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가 바로 대중을 대표한다. 그래서 나는 교실에서 얼마나 잘했던지, 나를 뽑아주면 현장에서 얼마나 잘 해낼 수 있을 건지와 아-무 상관없이 그냥 무능한 배우가 맞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날 버티게 한다. 적어도 내 실력이 부족하니까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버틸 수 있다. 실력은 그래도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이니까.


2. 나이 때문일까, 외모 때문일까.? 


연예인, 배우에게는 외모와 나이는 재능이다.

내일과 내일모레 나는 당연히 학원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오디션에 나도 참여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명단에 내 이름이 쏙 빠져있다. 왜지? 뭔가 실수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래서 담당자에게 당당히 문자를 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공지 사항을 덜 읽은 것이었다.


"소속사 측에서 프로필을 먼저 보고 관심 있는 사람들만 오디션 기회를 드린다고 합니다."


우리 학원에는 총 45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 몇 명은 코로나에 걸렸다고 하고 몇몇은 평일에 시간이 안돼서 지원하지 않았다고 하면 35명 정도가 지원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중 25명이 오디션 기회를 얻었다.


나는 그 25명 안에도 들지 못했다. 애초에 서류에서 탈락한 것이다. 내 상품가치가 그 정도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나를 서류합격시켜준 비-연예인 소속사 회사들(블록체인 회사, 마케팅 회사, 심지어 CJ)에 내가 얼마나 고마움을 모르고 나댔는지 모른다.


3. 삶에 지지 않는 법

 

방금 내가 오디션 해당자에 들지 못한다는 걸 알고 울 것만 같다. 그래도 나는 울지 않고 브런치를 켰다.


복근 운동 600개 정도 한 대신에 먹고 싶은 거 다 먹은 하루를 보내며 하겐다즈까지 입가심했고, 이제 또 400 개 더 하고 잘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듣고 나는 하겐다즈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아이스크림은 내 옆에서 녹고 있다.

 

만약 지금 이 상황을 영화로 표현하자면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비추며 울지 못하는 주인공의 눈물의 메타포로 사용하겠지.


여하튼... 만약 세상이 이런 식으로 나한테 오디션 기회조차 주지 않고 날 힘들게 한다면 나는 그걸 가지고 글이라도 쓸 것이다.


4. 내 삶에 라이언 고슬링은 없다.


라라 랜드 주인공 Mia(엠마 스톤) 에게는 라이언 고슬링이 있었다. 물론 참고로 극 중 미아는 나보다 나이도 훨씬 어리다. 그리고 번아웃에 시달리며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와중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진심으로 함께해주는 라이언 고슬링을 만난다.


나도 한때는 내게 라이언 고슬링 같은 존재가 나타나길 원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엄청난 마상만 남기곤 했다. 차라리 아예 아무도 없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남사친 예전에 한 말이 떠오른다.

 "아무래도 너랑 어울릴 남자는 없는 것 같아. 와, 그래, 우리 이건 서로 동의하네. 그렇지?"


이런 내 생활에 유일하게 위로를 해주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음식이었다. 물론 좋은 영화도 위안을 주지만, 음식만이 주는 위로가 있다.


얼굴살이 넘 많다는 피드백(팩폭)을 받고 나는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데 오늘 폭식을 했다.


뭐 따지고 보면 폭식도 아닌 게 :


- 아침 ; 베이글&크림치즈&에그타르트

-점심 : 고구마 치즈 돈가스 &라면

- 저녁 : 마라샹궈, 트러플 감자칩, 화이트 와인 조금, 아이스크림 조금


삼시세끼 챙겨 먹은 것뿐이니까.


물론 이 음식들이 좋은 음식은 아니다. 그래도 나에게 위안과 파이팅을 주는 음식들은 맞다.


방금 마라샹궈 기다리며 복근 운동 적어도 400개는 넘게 했으니 이제 글 쓰고 600개 더 하고 자면 된다. 여차 싶으면 내가 사는 15층까지 계단 오르기 4번 하고 자면 된다.


그렇다고 칼로리가 다 상쇄되는 건 아니지만 - 적어도 죄책감은 상쇄되겠지. 라이언 고슬링은 내 삶에 없어도 내겐 맛있는 음식과, 모아둔 돈과, 든든하고 약한 듯하면서 독해 빠진 나 자신이 있다.


https://studiohubbub.com/la-la-land-maybe-im-not-good-enough-monologue/

*위의 씬은 라라 랜드에서 미아가 "마지막으로 이 오디션을 봐라!"라고 말하는 라이언 고슬링한테 하는 유명한 독백이다. 영어권 연기 지망생들 모두가 한 번쯤은 도전한다는 그 독백. 나에게는 오디션 정보 물어다 주면서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훈남 썸남은커녕 그런 인간 1도 없다. 그게 영화와 현실의 차이다. 하하.*


5. 실패하지 못할 것 같다. 성공하란 보장은 없지만.


실패는 실패한 상태로 멈출 때 비로소 실패란 말이 있다. 부자를 꿈꾸는 친구와 나눈 대화가 기억난다.


"넌 부자가 못되면... 죽을 거야?"

(죽을 만큼 이루고 싶은 것에 대해 말하다가 나온 말)


"죽긴 왜 죽어! 난 실패해도 계속 다시 일어날 거야."


나는 비록 오늘 매우 슬프지만, 사실 그다지 슬프지 않다. 내가 연기를 전공하지 않고 연출을 전공한 건 다 이유가 있다. 이미 나는 사실 내가 이런 처지에 처할 것을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나는 내 영화를 만들고 그 안에서 연기할 것이다.


오늘 오디션을 망치고 풀이 죽은 나를 보고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 있다.


"배우라는 말 보다 창작자라는 타이틀로 살아가는 게 더 낫다 생각해요."


그래, 배우는 창작하는 사람이란 큰 틀 안에 있는 한 소분류 카테고리의 업자일 뿐이다. 연기는 엄연히 창작이고, 창작은 어떤 순간의 영감의 산물이 아닌 지리멸렬하고 지속적 노동의 결과라는 것을 난 잘 알지 않나?


그래서 난 실패한 게 아니다. 실패할 수 없다.

물론 배우로 성공해서, 스타 배우가 되어 연기만으로 부를 이룩하는 것을 목표로 잡으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그렇지만 애초에 내 목표는 그게 아니니까. 난 절대 실패할 수 없다. 100일의 도전이 끝난다 한들... 나란 인간, 절대 포기하지 않을 미련과 끈기 넘치는 인간이란건 확실하니까.


행복하자. 나는 행복하다. 내 시간을 내가 의미 있는 일에 쓸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그래서 울고 싶지만 울음이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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