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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lerie Lee May 07. 2022

배우 도전 일기 #5

휴, 다행이다.

05/07/2022 토요일


내일은 어버이날이다. 이 불효자식은 길가에서 파는 카네이션을 볼 때마다 입맛이 떨어진다.

도전 기간이 두 달도 채 안 남았는데... 지난번에 학원 오디션 서류에서 조차 탈락하고 나서부터 쭉 슬럼프였다.


금요일엔 하기 싫은 마음, '어차피 이렇게 노력해도 안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을 무찌르고 연습 했다.


오늘 아침엔 정말 일어나기가 싫었다. 한 달 전쯤 나는 새벽 6시에 눈을 떠서 운동을 2시간가량 하곤 했는데... 고작 한 달 밖에 안됐는데 이렇게 나약해지다니.


1. 다행이다(1)


나약한 마음을 부여잡고 학원으로 갔다. 학원에는 이제 막 처음 연기를 시작한 앳된 학생들이 새로 들어왔다. 실력 성장을 여정으로 비유하자면, 그들에 비해서 나는 확연히 멀리 와있는 것 같아서 사실 큰 위안이 되었다. 세월을 헛되이 보내진 않았구나. 이렇게 비교하는 마음으로 자기 위안을 하다니...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애들을 대상으로..! 참 멋없긴 하지만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2. 밀도의 차이.


하지만 선생님에 비해서 아직 내가 연기를 대하는 밀도는 확연히 달랐다.


아래는 내가 요새 연습하는 독백이다. 이름하여 "18 씬".


저기... 앵글이 틀렸잖아. 네가 생각을 해봐. 18 씬이잖아. 18 씬. (사이) 여기서 미정이가 따귀를 맞고 눈물이 그렁그렁 해져.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정우를 쳐다봐. 여기서 왜 팔로우가 들어가니?(사이) 저기... 희진아, 독립에서 상 탔다고 그게 참... 계속 가는 게 아니야. (사이) 너 혹시 들꽃 영화제에서 상 탔다고 이러는 건 아니지? 후... 자, 다시 봐봐. 여기서 팔로우가 들어가면 관객들이 보지를 못해. 오글거린다니까. 단단하게 클로즈 하나로 가는 게 맞아. 내 말 믿어. 응? 진행시킨다?(사이) 말을 해~그렇게 꽁해 있지 말고. 난 뭐 여기 놀러 왔어?(사이) 말 안 해?(사이) 그래! 너 감독이야! 내가 몰라? 그런데 이건 아닌 것 같으니까 내가 너 생각해서 말하는 거잖아. 18 씬 찍자고. 18 씬. 굉장히 중요한 18 씬 찍자고! 18 씬!(힐끗 보며) 상 타고 파리 가서 유학하고 오면 다 이러냐? 내가 그지 같으면 애초에  날 부르질 말든가! 왜 불렀어? 어? 왜! 이 시골 짝에까지 날 불렀냐고 그럼! 뭘 쳐다봐요? 하.. 굉장히 서운해.


이 대사를 나는 직관적으로 꼰대가 거들먹거리면서 자격지심 폭발하는 대사로만 생각했다. 물론 그런 대사가 맞다. 하지만 정말 그런 대사를 연기하려면, 그걸 관객도 느끼게 하려면 어떤 전술을 취해야 하는지 나는 잘 몰랐다.


선생님은 처음 부분 "저기... 앵글이 틀렸지" 서부터 "후, 자! 다시 봐봐... 진행한다?"까지의 부분을 정말 후배를 위하는 마음으로 연기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렇게 연습을 했더니 나 스스로가 너무 가식적으로 들려서 그렇게 하기 꺼려진다고 했다. 선생님은 그렇게 처음에 가식적이게 들려야 이후의 자격지심 폭발이 실제 자격지심 폭발처럼 느껴질 거라고 하셨다.


실제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사실 진. 짜. 자격지심이 강한 선배라면 애를 쓰고서라도 후배에게 지적하는 부분에서 혹여나 내가 꼰대처럼 보이면 안 되기 때문에, 실제로 상대를 위하는 것처럼 들리도록 애를 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오디션을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1분-2분의 시간 동안 흥미진진하게 상황에 몰입하려면 반전과 기승전결이 있어야 한다. 처음부터 비아냥대다가 끝에도 열폭하는 것보다는, 처음엔 정말 친절한 태도를 보이되 워딩은 어쩔 수 없이 상대를 까내리는 상황으로 가다가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폭발하는 자격지심 및 꼰대력(?)이 더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은 지당한 이야기다.


독백을 계속하다 보면 말 그대로 허공에다가 혼자 생쇼 하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인데, 선생님의 티칭과 '디자인'을 받고 나면 "아, 그래, 내가 비록 독백을 하지만 사실 이것은 하나의 상황과 상대 배우와 같이 연기한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또한 내 앞에 오디션 심사위원의 본질은 적어도 지루함만은 피하고 싶은 관객이라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사실 진정한 배우라면, 연기를 직업으로 삼고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학원에서 깨치지 않아도 되는 류의 것이다.


3. 다행이다(2)

오늘 학원에 가기 싫었던 이유는 이번 주에 있을 오디션이 또 한 번 서류에서 걸러지는 오디션 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또 안되는 거 아냐?"


"아냐, 이번엔 혹시 다를 수도 있잖아! 만약 오디션이 왔는데 내가 오늘 수업을 안 가서 후회하면?"


나는 그렇게 무기력과 비관적인 생각을 뒤로하고 학원으로 향했다. 수업 끝무렵, 오디션 명단이 발표 됐다. 학원 학생 45명 중 21 명 정도가 있었다. 찬찬히 살펴보니 내 이름이 있었다.


"와 하나님! 다행이다!" (독실한 기독교도 아닌데)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4. 연기를 왜 하는가에 대한 개인적 철학


선생님은 연기를 지속하는 힘이 개인적 철학에서 나온다고 하셨다. 내 철학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나는 달과 6펜스의 주인공과 내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나도 취직을 해서 남들처럼 돈 벌고 결혼해서 잘 살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연기를 한다고 하는 건 내가 이렇게 해야 살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요.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 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 스트릭랜드

학원 선생님은 내가 연기를 하는 것을 보고 "혹시 연기를 하는 자신을 좋아하나요?"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게 맞다. 부끄럽지 않다.


나는 연기를 하는 나 자신이 좋다. 연기는 나를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다. 나가 내 자신의 의사와 욕구와, 혼자서 믿고 있는 내 가능성과 재능을 존중하는 현재로써 유일한 방법이다.


내 연기 철학이 누구보다 더 뛰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솔직하다고 생각하고 어쩌면 굉장히 "Real(진짜)" 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사람이 하는 모든 일들은 살자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연기하는 것이 정말 나를 죽고 싶게끔 만든다면? 그만큼 힘들게 한다면? 그때는 관둘지도 모르겠다. 결국 나는 그냥 한 명의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평범한 인간이 어떤 특정한 것에 대한 열정이 있어, 그 하나에는 비범해지고 싶어 노력하는 것뿐이다.


적어도 오늘까지 내 연기 철학은 그러하다.

살기 위해 하는 헤엄, 물장구 같은 것. 그러나 이왕 하는 거 우아하게 접영도 하도 자유형도 하고 싶어서 훈련하는 것. 그리고 이왕 훈련하는 거 그걸로 돈도 벌고 인정도 받고 싶은 것. 그래서 결국은 엄마 아버지에게도 내가 되고 싶은 내 모습으로써 자랑스러운 딸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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