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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맹한 바닷가재 Nov 04. 2020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란?  

허지웅 답기에서 영감을 받다.

허지웅 답기 유튜브 채널을 구독은 했지만, 한 번도 끝가지 영상을 시청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제 올라온 영상은 꼭 보고 싶었다. 영상의 구성은 구독자가 보내온 사연을 읽고 상담이나 조언이 필요한 구독자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내용을 공개하는 방식이다. 어제 영상에서는 두 분의 사연이 공개되었는데 그중 두 번째 분의 사연이 인상 깊었다.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고, 죽음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여성분이었다. 여성분은 허지웅 씨의 조언을 듣고 이런 질문을 했다.


"작가님은 왜 사세요?"

그러자 허지웅 씨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 자신에 대한 그 어떤 정의 같은 게 있거든요. 일관된 정의가. 저는 어디까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보고 싶어서 살아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여성분은 "두렵지는 않으세요? 그렇게 못 해낼까 봐?라고 물었다.

허지웅 씨는 "그건 너무 먼 미래잖아. 나는 먼 미래는 생각하지 않아요. 당장 다음 달에 재발할지도 모르는데 뭐 하러 그렇게 미래까지 생각을 해. 괜히 스트레스받지"라고 답했다.(허지웅씨는 혈액암으로 투병을 하셨고 지금은 완치가 되셨다.) 

여성분은 "맞네요! 라며 웃음을 지었다.


나는 이 두 분의 대화 내용을 듣고 많은 울림과 영감을 받았다. 삶이란,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친한 형, 동생, 친구들이 있는 단톡 방에서 공개 질문을 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란 무엇인가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 단톡 방을 확인해 보니 몇 개의 답변이 있었다.

"타인의 다름을 인정할 수 있고 자신의 삶도 사는 사람인데 배려심이 있는 사람이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은 사람이요"와 같은 답변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도 종이에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란?이라는 질문으로 나름의 정의를 내려 보았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존재, 대화하고 싶은 존재, 사랑을 느끼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의한 좋은 사람과 지인들이 답해 준 좋은 사람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보고 한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바로 '공감'이라는 단어다. 배려심이 있고, 치유를 해주고, 대화하고 싶은 존재. 즉,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공감을 잘하기 위한 책을 읽어보고 노력해 보고 싶다는 동기가 생겼다.


영국이 사랑하는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1857-1934)는 독학으로 작곡기법을 스스로 연마해 1904년에 기사 작위까지 받은 그야말로 작곡가로 성공한 중산층이었다. 하지만, 그는 성공에도 불구하고 늘 자신의 집안이 장사꾼이었다는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느꼈다고 한다. 아무리 성공을 해도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누군가 그의 마음을 공감해주고 이해해주고 괜찮아. 너는 이미 충분히 훌륭하고 좋은 사람이야라고 이야기해주었다면 엘가는 보다 행복한 삶을 살다 삶을 마무리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의 열등감이 1919년에 완성된 첼로 협주곡이라는 대작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 이 곡은 엘가 사후 1960년이 되어서야 열광적인 반응을 얻게 되었는데 우울하면서도 내면적인 서정성이 영국인들의 공감을 끌어낸 것 같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죽어서야 자신의 마음을 공감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살아있는 동안 누군가를 공감해 주고 누군가로부터 공감받는 삶은 참으로 축복받는 삶이라고 본다.

오늘도 더 좋은 나를 확인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보련다.


품격 있는 나, 가슴 뛰는 내일

매일 성장하는 삶을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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