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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맹한 바닷가재 Jan 03. 2020

정서의 핵폭탄 ‘고백’

고마워, 대단했어, 미안해

 음악은 힐링, 기분 전환, 추억 소환이라는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가수 양준일 덕분에 90년대 감성이 되살아 나고 있다. 90년대 들었던 노래들을 하나씩 들어보다가 내 귓속에 계속해서 머물고 있는 곡이 하나 있다. 전람회의 '취중진담'이다. 1996년 4월에 출시된 앨범에 수록된 타이틀 곡으로서 나는 이 노래를 이듬해인 1997년 한 여름날 교실에서 처음으로 들어봤다. 그런데 아직도 이 노래만 들으면 기분이 묘하다. 그 이유는 이 곡이 나오기 전 멘트 때문이다.


신청곡입니다. 1학년 6반 000 학생이 1학년 7반 000 학생에게 보내는 곡 선물이라고 하네요. 자신의 마음을 담은 곡이라고 하는데요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전람회의 '취중진담'


 방송반 DJ학생은 분명 내 이름 석자를 또박또박 발음했다. 심지어 반까지 거론했으니 누가 봐도 나다. 주변 친구들은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고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취중진담'을 끝까지 들었다. 친구는 얼굴이 빨개졌다며 놀리기까지 했다. 나는 노래를 들으면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래의 하이라이트인 후렴 가사 때문이다.

이젠 고백할게 처음부터 너를 사랑해왔다고 이렇게 널 사랑해


 그렇게 '취중진담'을 알게 됐다. 질풍노도의 시기인 사춘기 때 나는 늘 짝사랑만 해봤지. 한 번도 고백한 적 없는 풋내기 청소년이었는데, 누군가 나에게 고백을 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큰 충격이었다. 마치, 정서의 핵폭탄을 맞은 것 같았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그 친구의 용기에 감동했다.


 며칠 후 삐삐(호출기)가 왔다. 삐삐에 녹음된 음성에는 화이트 데이를 맞아 우리 집에 초콜릿을 주러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우리 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지?라는 생각과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알고 보니 우리 집 주소는 당시 출석부에 기재된 주소로 알았던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결국 그 날 친구 집으로 도피했다. 고백에 대한 거절 자체가 부끄럽고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그 친구가 다녀 간 흔적이 있었다. 장미꽃 한 송이와 초콜릿이 문 앞에 놓여 있었다.

무선 호출기와 장미 꽃

 자기 전 삐삐가 왔다. 들어보니 "한참 기다렸는데 오지 않아서 그냥 집에 갔어.  마음을 직접 듣고 싶었는데 아쉽구나. 이제 귀찮게 하지 않을게 안녕"이라는 말이 녹음되어 있었다. 그 음성을 듣고 미안함 마음이 올라왔다. 우리 집까지 찾아온 사람을 상대 조차 해주지 않았던 나 자신에 대해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때 당시 나의 판단과 행동은 최선이었다. 엄격했던 부모님의 교육 때문에 청소년기에 연애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취중진담'과 호출기에 녹음된 그 친구의 음성과 선물은 그야말로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용기 내서 고백하고 자신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 행동했던 그 친구에게 이제라도 "고마웠어", "대단했어", "미안했어"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23년이 지났지만, 그 친구의 행동에서 큰 교훈을 얻었다. 거절을 두려워 하지 말고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행동하라!’


취중진담 들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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