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 대단했어, 미안해
음악은 힐링, 기분 전환, 추억 소환이라는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가수 양준일 덕분에 90년대 감성이 되살아 나고 있다. 90년대 들었던 노래들을 하나씩 들어보다가 내 귓속에 계속해서 머물고 있는 곡이 하나 있다. 전람회의 '취중진담'이다. 1996년 4월에 출시된 앨범에 수록된 타이틀 곡으로서 나는 이 노래를 이듬해인 1997년 한 여름날 교실에서 처음으로 들어봤다. 그런데 아직도 이 노래만 들으면 기분이 묘하다. 그 이유는 이 곡이 나오기 전 멘트 때문이다.
신청곡입니다. 1학년 6반 000 학생이 1학년 7반 000 학생에게 보내는 곡 선물이라고 하네요. 자신의 마음을 담은 곡이라고 하는데요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전람회의 '취중진담'
방송반 DJ학생은 분명 내 이름 석자를 또박또박 발음했다. 심지어 반까지 거론했으니 누가 봐도 나다. 주변 친구들은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고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취중진담'을 끝까지 들었다. 친구는 얼굴이 빨개졌다며 놀리기까지 했다. 나는 노래를 들으면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래의 하이라이트인 후렴 가사 때문이다.
이젠 고백할게 처음부터 너를 사랑해왔다고 이렇게 널 사랑해
그렇게 '취중진담'을 알게 됐다. 질풍노도의 시기인 사춘기 때 나는 늘 짝사랑만 해봤지. 한 번도 고백한 적 없는 풋내기 청소년이었는데, 누군가 나에게 고백을 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큰 충격이었다. 마치, 정서의 핵폭탄을 맞은 것 같았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그 친구의 용기에 감동했다.
며칠 후 삐삐(호출기)가 왔다. 삐삐에 녹음된 음성에는 화이트 데이를 맞아 우리 집에 초콜릿을 주러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우리 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지?라는 생각과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알고 보니 우리 집 주소는 당시 출석부에 기재된 주소로 알았던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결국 그 날 친구 집으로 도피했다. 고백에 대한 거절 자체가 부끄럽고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그 친구가 다녀 간 흔적이 있었다. 장미꽃 한 송이와 초콜릿이 문 앞에 놓여 있었다.
자기 전 삐삐가 왔다. 들어보니 "한참 기다렸는데 오지 않아서 그냥 집에 갔어. 네 마음을 직접 듣고 싶었는데 아쉽구나. 이제 귀찮게 하지 않을게 안녕"이라는 말이 녹음되어 있었다. 그 음성을 듣고 미안함 마음이 올라왔다. 우리 집까지 찾아온 사람을 상대 조차 해주지 않았던 나 자신에 대해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때 당시 나의 판단과 행동은 최선이었다. 엄격했던 부모님의 교육 때문에 청소년기에 연애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취중진담'과 호출기에 녹음된 그 친구의 음성과 선물은 그야말로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용기 내서 고백하고 자신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 행동했던 그 친구에게 이제라도 "고마웠어", "대단했어", "미안했어"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23년이 지났지만, 그 친구의 행동에서 큰 교훈을 얻었다. 거절을 두려워 하지 말고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행동하라!’
#매일글쓰기 #아무리바빠도매일글쓰기 #아바매글 #글밥의매일글쓰기
I did it my way!
가슴 뛰는 내일, 품격 있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