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전이 완료되었습니다.' 일어나자마자 마주하는 하루의 첫 문장이다. 밤사이 뒤척여 눈꺼풀이 무거운 나와는 달리, 4년을 함께한 내 휴대폰은 빈틈없이 꽉 찬 배터리로 쌩쌩하게 아침을 연다. 100이라는 숫자가 주는 안도감이 있다. 뭘 해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 온종일 영상을 보고 노래를 틀어도 끄떡없을 것만 같다. 꿈속에서의 나는 종종 휴대폰을 들고 나타난다. 남은 배터리라고는 고작 2%뿐, 그것도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어느 낯선 땅에서 말이다. 길을 찾기 위해 지도 앱을 누르는 순간, 휴대폰 전원이 나가는 동시에 잠에서 깨어나곤 한다. 똑같은 꿈을 여러 번 꾼 걸로 봐선 무의식적으로 충전에 대한 강박 비슷한 게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뉴스는 세계 곳곳의 사건과 사고를 알려주고, 덤으로 찝찝함을 안겨준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경각심을 일깨워 준다. 아무튼 최근 들어 나의 강박 관념을 눌러버린 기사가 하나 있는데, 바로 전기차 화재에 관한 이야기다. 여러 원인이 있겠다만, 그중 하나가 배터리 과충전이라고. 자동차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괜스레 근심이 가득해졌다. 잠들기 전 어김없이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았는데 머릿속에 경보가 울려댄다. 가뜩이나 혼자 사는데 휴대폰이 터져버리면 곤란하다. 아마 그럴 확률은 현저히 낮겠지만, 만약을 대비해 미리 손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떠오르는 방법이라곤 최대 85%까지만 충전하게 하는 배터리 보호 모드를 설정하는 것이다. 100%에 비하면 턱도 없어 보인다. 어쩌면 여태 꿔온 꿈이 예지몽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찜찜함이 든다. 그저 85%짜리의 하루가 부족함 없이 흘러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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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가득 채워왔던 건 배터리뿐만이 아니다. 방 한편에 자리 잡은 삼단 서랍은 크기는 작아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제일 위 칸엔 색연필과 종이, 그 아래 칸엔 각종 응급약이, 마지막 칸엔 고무장갑과 같은 여분의 생필품이 들어있었다. 누구에게나 초심이라는 게 있듯, 우리 집 서랍장도 마찬가지다. 각 층마다의 분담이 뚜렷했지만, 덤으로 받은 화장품과 반창고 등 갖가지 것들이 추가되다 보니 그 경계가 흐릿해져 버렸다.
'이걸 버려, 말아?' 첫 번째 칸 색연필 더미에서 파란 봉투 한 장을 발견했다. 최소 4개월 전에 받은 숙박 이용권이다. 강원, 경남, 전북, 전남, 부산, 충남 그리고 제주까지. 전국 곳곳에 있는 18개의 펜션 중 한 곳을 무료로 예약할 수 있나 보다. 안타깝지만 갈 여건이 안 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건을 만들 만큼의 마음이 없다. 이 이용권의 운명은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다. 부엌 선반 위에 있는 먼지 쌓인 커피 캡슐의 처지를 따라갈 게 뻔하다. 주말마다 한 잔씩 마실 각오로 산 커피 캡슐은 어느덧 생을 마감한 지 3개월 차다. 죄책감과 아쉬움에 발목이 단단히 잡혀 여태 선반 구석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용권 또한 그저 한낱 종이 쪼가리가 되어 공간만 차지하게 될 게 눈에 훤하다.
한참을 서서 버릴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이용권을 도로 봉투 안에 넣어 서랍장을 닫았다. 갑작스레 필요하게 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렇게 집 안의 지박령이 하나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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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그런 사람들의 소식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접하게 된다. 어쩌면 가장 최초로 만난 미니멀리스트는 엄마일지도 모른다. 안 쓰는 물건은 끝까지 안 쓰며, 버리면서 정리해야 한다던 엄마의 잔소리가 그에 대한 신념이었던 거다. 그렇다면 이를 듣고 자란 나는, 최소한 미니멀리스트는 아니라는 방증이 된 셈이다. 맥시멈리스트까지는 아니더라도 미니멀과 맥시멈 사이, 그 어디쯤인 건 확실하다.
집안의 모든 물건을 꺼내는 데 고작 8분밖에 안 걸린다는 미니멀리스트 사사키 씨, 이거면 됐다고 생각한다는 마음가짐이 그의 집과 똑 닮아 보인다. 집은 거대한 마음 같다. 눈으로 훤히 볼 수 있는 속내 같은 것. 취향, 불안, 아쉬움이 한 데 섞여 집 안 구석구석을 채운다. 서랍과 선반, 책장과 옷장 안에서 먼지 쌓일 정도로 오래 자리한 것들이 그간 꼭꼭 숨겨온 욕심일 거다. 장마철 눅눅함을 잔뜩 먹은 인센스 스틱과 몇 년간 펼쳐보지도 않은 공책도 마찬가지다. 이것들로 물욕을 채웠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넘쳐나는 물건 탓에 서랍을 여닫는 데 힘이 들어간다면 문제가 있다는 명백한 신호일 거다.
마음을 어지럽혀 보기로 했다. 이곳저곳, 평소 손이 잘 안 닿았던 곳까지 싹 다. 우선 집의 15%까지만 비우는 걸 목표로 한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혹은 그렇게 될 물건들이 그 타깃이다. 기장이 애매해 손이 안 가는 청바지 세 벌이 1순위다.
마음을 덜어내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후회하진 않을지, 뒤늦게 진가를 발휘하면 어쩌나 싶은 얄팍한 가능성에 질척거리는 사람이 되곤 한다. 큰맘 먹고 조금은 냉정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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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전이 정지되었습니다. 배터리 보호를 위해 85%까지만 충전됩니다.'
최근 들어 눈 뜨자마자 나를 반겨주는 문장이다. 휴대폰 충전이 완료되었다던 간결한 문장에서 족히 2배는 길어졌고, 액정 상단의 배터리 잔량 이미지엔 약간의 여백이 생겼다. 한결 가벼워진 집도 마찬가지다. 넉넉해진 수납공간 덕분에 물건이 엉겨 서랍장이 제대로 안 닫힐 일이 없다. 빽빽했던 배터리와 서랍 속에 생긴 여유 공간이 낯설게 느껴진다. 뭔가 허전한 느낌, 그렇다고 이 느낌이 마냥 싫지만은 않다.
비워야 한다던 엄마의 말과, 이 정도면 됐다던 사사키 씨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비우고 나니 충분하다 싶어졌다. 오히려 더해진 게 있다면 묘한 해방감일 것이다. 가득 충전해야 한다는 강박감과, 만약을 위한 완벽주의로부터 자유로움을 느낀다. 배터리와 집의 일부와 함께 마음의 짐 또한 덜어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