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담 Jun 02. 2024

안녕, 잘 자, 사랑해



서울에서 KTX로 두 시간 거리,
할머니를 보러 광주에 다녀왔다.
할머니의 건강이 악화됐다는 전화 한 통에
할머니와 닮은 사람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는 건 언제나 설렌다.
누가 어떤 표정으로 문을 열어주려나.
역시 가장 먼저 반겨주는 건 집주인인 이모였고,
그다음은 춘천 외삼촌이 고개를 빼꼼 내미셨다.
마지막으로는 오늘의 주인공인 할머니,
현관 옆 기다란 소파에 앉아
두 눈을 꾹 감은 채 서울 집을 맞이해 주셨다.


만나지 못한 세월만큼 주고받는 인사는 화려하다.
특별할 것 없는 안부에 웃음이 더해지고,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말끝을 길게 늘어트린다.
왁자지껄한 틈 속에서도

할머니는 용케 곤히 주무신다.


할머니는 올해로 93세인데,
이모의 표현을 빌리자면
장기가 하나둘 망가져가는 중이시다.
시력과 청각이 나빠진 건 물론이거니와,
혈액 순환이 원활하지 않다 보니
앙상했던 손과 발은 퉁퉁 부어서
오히려 살이 오른 것처럼 보였고,
거기에 콧물 녀석은 눈치 없이
때를 가리지 않고 주룩 나오는 식이다.


- 엄마 막내 왔어! 애들도 같이 왔어!!!


서로의 뺨이 닿을랑 말랑한 거리에서
소리치다시피 할머니께 인사를 건네는 엄마.
여러 번 반복 끝에서야 할머니의
꼼짝 않던 눈꺼풀이 반쯤 열렸다.


- 우리 막내 왔냐. 아이고 사랑하는 강아지들,
  얼마나 더 예뻐졌을까.


그래도 작년까지만 해도 표정에
반가움이 선명하게 묻어났는데
올해는 수면욕이 압승해 버렸다.
잠꼬대 비슷한 중얼거림 끝에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할머니는
곧장 다시 잠에 취하셨다.
 

앉아서 자면 허리에 무리가 가니
할머니를 침대에 뉘어야겠다며
이모가 노련하게 할머니를 일으켜 세웠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리고 조심 또 조심.


- 꽃아 꽃아 잘 자. 할머니는 자러 들어가련다.
  잘 자, 사랑해.
 

침실에 들어가기 전 만개한 화분 하나가 있다.
외삼촌이 할머니 생신 설물로 보낸 꽃인데,
할머니의 최근 일과 중 하나가
그 꽃과 대화하는 것이란다.


노인과 어린아이는 닮았다.
한 시도 긴장을 놓쳐서는 안 되니까.
하루는 할머니가 말하는 법을 까먹으셨다고 한다.
그 옆을 지키던 이모는 우리가 알지 못할
갖가지 노력을 했을 테고,
그중 하나가 자기 전에 꽃에게
인사를 하라고 시킨 거였다.
처음에는 더듬더듬 '잘 자'나 '안녕' 같이
간단한 인사뿐이었는데,
입이 풀리셨는지 문장이 점차 길어졌다고.


다음날 아침 할머니는 또 소파에서 잠이 드셨다.
그리고 익숙하다는 듯 이모는

어제와 같이 행동에 나섰고,
할머니는 그런 이모에게 몸을 맡긴 채

한 발씩 이동하셨다.


- 엄마 꽃한테 말하고 가야지!
- 안녕 꽃아.


우리는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이제 가보겠다고, 다음에 또 만나자고.
모든 게 순식간이었고

또 그만큼 강렬했던 만남이라 그런지
짧은 영화 한 편을 본 것만 같다.
영화관을 빠져나와 감상평을 나누듯,
서울행 기차를 타러 가는 길은
온통 지난 하루에 대한 소감뿐이다.
엄마는 할머니가 꽃이랑 대화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참 소녀 같은 분이셨어.
 양반집 기수 출신이라

 바느질도 얼마나 잘하셨는지.
 여전히 소녀 같으시네.


나이가 들면 애가 된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꽃이 피었다 다시 흙의 일부로 돌아가듯,
할머니는 어릴 적 소녀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중이시다.


아마 오늘도 할머니는 소파에서 잠이 들 것이고,
또 이모에게 이끌려 침실로 가는 길에
꽃에게 사랑 고백을 하시겠지.
아무래도 분홍 꽃은 할머니의 말을 양분 삼아
싱그럽게 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지금쯤이면 또 잠에 취해계실 우리 할머니,
할머니도 잘 자요 그리고 사랑해요.

매거진의 이전글 샤프 대신 연필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