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겨울, 그녀를 처음 만난 날이다. 미쳐 이 글을 쓰는 것에 대해 그녀의 동의를 구하지 못했으므로, 이름 대신 '수 씨'라는 애칭을 써야겠다. '수'는 그녀의 이름 석 자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절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수 씨의 헤어스타일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긴 뽀글머리, 일명 히피펌이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다. 허리까지 길게 늘어진 곱슬머리는 멀리서 봐도 그녀임을 증명한다. 그녀에게 있어 미용실이란 오로지 머리카락의 끝을 살짝 다듬는다거나, 곱슬곱슬한 머리를 더욱 곱슬거리게 만드는 수단일 거다. 여태껏 수 씨가 긴 곱슬머리를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대체로 그렇듯, 헤어스타일은 인과관계라기보단 취향의 문제이다 보니 그러려니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늘 그렇듯, 지레짐작한 추측은 정답이 아니다. 알고 지낸 세월과 서로를 아는 정도가 비례하지만은 않다는 걸 수 씨와의 대화를 통해 뼈저리게 느낀다. 연을 이어온 지 30년 만에서야 그녀가 왜 긴 곱슬머리를 좋아하는지 알게 됐으니. 어릴 땐 돈이 많고 대단한 업적을 이뤄낸 누구보단, 평평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보인다. 하늘을 날거나, 요술봉을 휘두르고, 혹은 갖은 역경 속에서 보란 듯이 성공해 내는 만화 속 주인공들처럼. 나에겐 세일러문이, 그녀에겐 들장미 소녀 캔디가 그랬다. 좋아하면 닮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양갈래 머리를 한 세일러문이 어찌나 예뻐 보이던지. 어릴 적 상상 속의 난 늘 긴 양갈래 머리였다. 나와는 달리 수 씨는 용감한 사람이다. 단지 상상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었으니까. 어린 시절의 그녀는 미용실에 그림 한 장을 들고 갔고, 그 그림과 똑같이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보통 미용사에게 연예인과 같은 사람의 사진을 보여주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녀가 바라는 건 그림 속에 있었다. 아마 그녀라면 캔디가 환하게 웃는 그림으로 준비했을 거다. 긴 곱슬머리는 더 이상 캔디의 것만이 아니다. 몇십 년 동안 고수한 수 씨의 것이기도 하다.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미용실에 갈 때 그림을 챙기지 않는다는 것. '히피펌'이라는 아주 간단한 주문법이 있으니 말이다.
*
아주 오랜만에 수 씨와 약속을 잡았다. 약속 장소는 월남쌈 집, 고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그녀다운 선택이다. 그녀가 이미 한 번 가봤던 곳으로, 맛도 좋고 직원도 친절하다며 나 또한 좋아할 거라고 확신했다. 수 씨를 따라간 곳엔 2인 세트 메뉴가 있었는데, 월남쌈에 사이드 메뉴 두 가지가 얹어 나오는 식이다. 나와 수 씨, 두 사람에게 있어 '2인'이라는 구성만큼 적당한 게 또 어디 있나 싶었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그녀가 입이 짧다는 건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그녀와 푸짐한 한 상이 먹고 싶었기에 조금은 무리해 보기로 했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양배추, 계란지단, 피망, 게맛살, 새싹채소, 무순, 단무지, 당근, 깻잎 그리고 새우와 고기까지 다양한 속 재료가 가지런히 나열되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레몬이 둥둥 떠다니는 따뜻한 물에 뻣뻣한 라이스페이퍼를 살짝 데친 후, 원하는 재료를 넣어 스위트 칠리소스나 땅콩소스에 콕 찍어 먹으면 된다. 평소 치킨 두 조각이면 배부르다고 하소연하는 수 씨는 예상대로 쌈 몇 점에 젓가락을 내려놨다. 먹는 양이 적은 만큼 그녀의 젓가락질은 신중한 편이고, 이를 통해 그녀의 입맛을 엿볼 수 있다. 각종 야채 중에서도 향긋한 깻잎을, 역시 고기보단 부드러운 새우를, 그리고 고소한 맛보단 달달한 소스를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밥을 먹고 난 후엔 쇼핑을 했다. 수 씨는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잠옷용 티셔츠와 일상용 티셔츠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녀가 말하는 '편하다'의 기준은 명확하다. 넥라인과 기장, 아무리 디자인이 예쁘다 한들 두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인정사정없이 탈락이다. 목이 답답하지 않아야 하고, 바지 안에 넣어 입을 정도로 넉넉한 기장이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의 옷이 있다면 남자 옷이어도 상관없다며, 오로지 옷 고르기에 열중이다. 한 20분쯤 흘렀을까. 수 씨의 뚜렷한 기준 덕분에 쇼핑은 순식간에 끝났다. 아마 나였으면 마음에 드는 것투성이라 족히 2시간은 걸렸을 거다. 그녀의 여리여리함에 내재한 결단력을 여기에서 본다. 그리고 하나 더, 그녀는 목이 답답한 걸 무진장 싫어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수 씨와 나는 문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지만, 내가 아주 살짝 더 가까운 측에 속할 거다. 쇼핑도 끝났겠다, 마지막 일정으로 그녀에게 대뜸 네 컷 사진을 찍으러 가자 했다. 어리둥절해하는 그녀를 위해 '유행'이라는 표현으로 안심시켰는데, 이미 그녀의 머릿속엔 머리를 풀지 말지에 대한 사소한 고민으로 가득하다. 포토 부스에 들어가기 전 그녀와 나란히 거울 앞에 서서 용모 단장을 했다. 결국 그녀는 질끈 묶고 있던 머리를 풀어 헤치는 쪽을 택했고, 한층 더 그녀다워졌다. 수 씨는 나와는 달리 카메라 앞에서 능숙한 사람이다. 10초 남짓인 시간 동안 표정과 포즈를 자유자재로 취한다. 이번엔 팔로 큰 하트를 만들고, 그다음엔 서로 기대어 찍자며 진두지휘한다. 프레임 속의 그녀는 당당함과 카리스마로 가득했다. *
수 씨와 다음을 기약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진 모르겠다. 분명하게 정한 건 연월일시가 아닌 그날의 메뉴뿐이니. 그땐 꼭 월남쌈 1인 세트에 단품을 추가해 먹을 거다. 수 씨와 헤어진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말에 동의하는 편이다. 침대 옆 선반에 놓인 사진 한 장이 그녀와 보낸 하루를 증명한다. 사진을 물끄러미 봤다.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긴 곱슬머리에, 깔끔하게 바지 안에 넣어 입은 브이넥 티셔츠까지. 이 모든 게 영락없는 그녀다. 여전히 들장미 소녀 캔디를 좋아하고, 목이 답답한 걸 싫어하며, 조금은 당찬 수 씨의 또 다른 이름은 엄마다. 엄마라는 호칭에 가려진 한 여자의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녀를 알고 지낸 30년 중 그녀를 가장 선명하게 보는 순간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