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 압력, 자기력 그리고 창조력. 세상엔 눈에 보이지 않는 힘들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이 중 파장이 가장 큰 힘은 단연코 창조력이다. 사람에 따라 그 결과의 형태와 의미가 천차만별이니까. 그래서 어떠한 힘보다도 흥미롭고, 매력적이며, 특별한 걸지도 모른다.
특별함을 지키고 싶은 건 인간의 본성일 거다. 특히 그것이 '나의 것'이라면 그 의지는 더욱 막강해진다. 책상 중앙에 선을 긋고, 낯선 연필 꽁다리가 내 공간에 조금이라도 넘어오는지 뜬 눈으로 감시하던 시절만큼이나 필사적으로 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이름 석 자를 남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의 손으로 직접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일 거다. 자음과 모음, 점과 선, 어조와 음정, 표정과 몸짓. 특출나게 높은 지능을 가진 동물답게, 사람은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도서관에 빽빽이 꽂혀 있는 이름들이 바로 그 증거 중 하나다. 한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김 씨부터,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발음조차 어려운 아무개까지. 국가, 인종, 성별을 넘어 책장 한편에 당당히 세를 내고 있는 이들이다.
책장도 하나의 세계다. 책의 장르가 무엇인지, 제목의 첫 자가 무엇인지에 따라 부여된 고유 주소로 한두 권씩 채워진다. 그렇게 저자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안전지대 속에서 이야기를 지켜낸다.
어쩌면 책장이 가로로 널찍한 것도 그들에 대한 배려일지도 모른다. 만약 탑을 쌓듯 책을 보관했다면, 어떤 책은 모든 무게를 견뎌야 할 바닥 아래로, 또 어떤 책은 중간 어딘가에 이도 저도 못한 채 어설프게 끼어 있었을 테니까. 세상의 모든 책은 높낮이 없이 공평한 권리하에 보호받는다.
422쪽 다음이 424쪽이었던가. 간혹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조각난 페이지를 발견하곤 한다. 위에서 아래로, 무자비하게 찢긴 자국들. 결을 보아하니 어떠한 망설임도, 일말의 죄책감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423쪽의 행방을 알 길이 없다. 누군가의 식탁에서 냄비 받침대로 쓰이고 있거나, 비밀스러운 일기장의 한 페이지로 탈바꿈했을지도 모른다. 만에 하나 우연히 스치더라도 그것이 '그 책의 그 페이지'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할 거다. 집 나간 개는 다시 찾기 어려운 법이다.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는 순간, 더 이상 코코가 아닌 '보리'라는 이름으로, 타의로 인해 감쪽같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될 테니까.
어딘가를 유유히 떠돌아다니고 있을 423쪽이 안녕한지 궁금하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을 수많은 창작물의 출처 또한 궁금해진다. 그들의 본연의 이름이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는지 조심스레 안부를 묻는다.
이름과 주소가 있는 존재들에게는 예의를 지켜야 마땅하다. 누구도 타인으로부터 침범당하고 싶어 하지 않듯, 창작물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허락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는 건 크나큰 실례다. 노크와 인사처럼 가벼운 인기척으로 서로를 존중하듯, 창작물에도 그런 배려가 필요하다.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사소하리만큼 작은 흔적을 남기는 것에서부터 배려는 시작된다.
존중과 배려가 모여야 비로소 지켜지는 권리, 그것이 바로 저작권이다. 더 이상 또 다른 423쪽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4월 23일 저작권의 날을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