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태어나 정식적으로 내뱉은 첫 말은 '엄마'와 '아빠'를 뭉개 발음한 소리일 것이다. 갓 태어난 존재에겐 부모가 곧 세계이고 우주다. 두 발로 똑바로 서고 제구실을 톡톡히 해낼 때쯤에서야 세상의 중심이 부모에서 '나'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부모에게서 독립을 하는 것이 새로운 세상에 내딛는 첫걸음일 것이다.
독립을 한 지 어느덧 5년 차다. 가족의 그늘 아래 웅크리고 있던 시간에 비해 턱 없이 짧은 기간이지만, 나만의 세계를 일궈내기엔 충분했다. 세 번째 이사를 끝마침과 동시에 그 세계가 한층 더 확장됐다고 말할 수 있을 거다. 함께 사는 사람이 생겼다. 이제는 혼자가 아닌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손발을 맞춰가며 이전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중이다.
"안녕"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문득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정신 건강에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곤히 자는 민이에게 인사를 건네며 하루를 시작할 때면 그 생각은 확신으로 바뀐다. 내가 안녕이라 인사하면 그도 안녕이라 답한다. 이것이 우리 세계의 암묵적인 규칙이다. 아무 탈 없이 편안함, 안녕의 사전적 의미는 평화롭기 그지없다. 서로에게 밤사이의 안부를 묻는 담백한 단어다. 잠들기 직전까지 서로를 바라봤음에도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또 궁금해하는 일. 자다가 새벽에 깨지는 않았는지, 춥지는 않았는지 등 이런 사사로운 질문을 함축한 말이 바로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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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사람끼리 같은 시간에 출근한다는 것도 어찌 보면 행운이다. 첫 끼니를 마주 보며 먹을 수 있고, 현관문을 나서기 전 서로의 겉옷을 챙겨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짧게나마 아침 풍경을 함께 누릴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매일 아침 우리가 정해진 시간에 집을 나서는 것처럼, 이 동네 사람들도 저마다의 규칙에 따라 하루를 시작한다. 오전 7시 20분, 나와 민이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규칙이 맞물릴 시간. 집에서 역으로 걸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총 네 개의 작은 세상과 마주친다.
집을 나서자마자 중년의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아무도 없는 무인 카페에서 혼자 여유롭게 커피를 홀짝이는 남자. 실제로도 그가 여유가 있는지 알 길이 없지만, 꼿꼿이 허리를 세운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태에서 왠지 모를 여유가 느껴진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그를 '윤 사장님'이라 부른다. 카페 금방에 자리한 윤 뭐시기라는 가게의 이름을 인용한 별명이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그는 한 가게를 책임지는 듬직한 사장님이 되어버렸다.
윤사장님을 지나 곧 30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와 마주친다. 한 170cm 후반 정도 되려나. 키가 아주 크고 부지런한 여자다. 바로 옆집 아니면 그 옆 옆집에 사는 이웃인데, 오른쪽 어깨에 수영 가방 비슷한 걸 매고 왼손엔 빵 봉지를 쥔 채 아파트 현관을 늘 그렇다는 듯 통과한다.
키 큰 여자와 마주친 골목에서 좌회전할 땐 물벼락을 조심해야 한다. 골목길 모퉁이에 있는 인쇄소 사장님이 아침을 열 시간, 그의 깔끔함과 비례한 만큼 흠뻑 젖어있는 물걸레가 좌우로 탈탈 털리는 중이다. 이것이 바로 인쇄소 사장님만의 손님맞이 루틴이다. 하루라도 빼먹으면 찝찝한, 몸에 선명하게 밴 습관이지 않을까 싶다.
골목길 끝자락과 만나는 도로가 옆에 줄지어 있는 사람들을 지나면 바로 지하철역이다. 여자 하나에 남자 넷, 불균형적인 성비 덕에 눈길이 간다. 회색빛의 대형 관광버스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이들을 태우고 사라지는데, 회색빛 뒤꽁무니가 멀어질 때쯤 문득 궁금해진다. 다들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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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 범위 내에 있던 사람들을 찾아 오늘도 습관적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과연 오늘은 그곳에 있을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요즘 통 보기 힘들었으니 다시 마주치면 분명 반갑고 또 안심될 거다. 그러니까 예전 같이 마주치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긴다.
규칙은 조금씩 변해간다. 또렷한 색이 옅게 발해가며 그날의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흘러간다. 네모에서 동그라미, 동그라미에서 세모가 되듯, 알게 모르게 새로운 구색을 갖춰나간다. 준비가 늦어지는 바람에 5분 정도 집을 늦게 나선 우리처럼, 이곳 사람들도 얼마든지 평소와는 다른 형태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거다. 어쩌면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날이 추워진 탓에 수영이 아닌 다른 운동에 시선을 돌렸을 수도, 인쇄소 청소보다 급한 출장이 잡혔다거나, 지금보다 더 나은 일거리를 찾아 떠난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세상은 조금씩 움직인다. 나와 민이도.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이곳도.
아침 7시 25분. 민이와 함께 5도 정도 틀어진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요즘이다. 이 각도가 우리의 새로운 규칙이다.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서로의 안녕을 묻는 건 여전하다. 눈을 뜨고 가장 처음으로 안부를 묻는 상대가 민이라서, 그리고 그와 함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낯선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앞으로 더 많은 세상과 마주할 거다. 부모로부터 시작된 자그마한 세상이 미미하지만 분명하게 불어나는 중이니까. 어느덧 다른 이의 안부를 물을 수 있을 만큼 어엿한 어른이 되어버린 거다.
지구는 둥글다. 윤 사장님과 더불어 스쳐 지나간 모든 인연을 또다시 마주치기 딱 좋은 세상. 그때까지 부디 안녕들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