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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당신의 가장 빛나는 순간

노이즈가 가득한 사진 한 장의 무게

by 가담



부모님이 손가락 한마디보다 얇은 스마트폰으로 세상을 선명하게 담아낼 때, 나는 벽돌같이 무거운 필름 카메라로 노이즈가 가득한 세상을 담아 본다.



마지막 36번째 셔터를 누르며 필름이 감기는 소리가 들리면 벅차면서도 묘한 감정이 든다. 하나의 필름을 다 썼다는 것은 그동안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필름을 장만하기 위해 지갑을 열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필름 최소 금액 20,900원”


필름을 구매하기 위해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작년보다 금액이 또 올랐다. 필름 카메라의 하이라이트인 네모난 종이 한 장을 얻기 위해 스캔부터 인화의 모든 과정을 다 거치면 총 삼만 원가량의 비용이 든다.

부모님은 자신들이 30년 전에 사용했던 낡은 고물에 꾸준히 비싼 돈을 들이는 나의 미련한 모습과 내 어깨에 생긴 선명한 빨간 끈 자국을 보시며 필름 카메라의 무게를 어림짐작하시고서는, 가볍고 화질이 좋으면서 사진을 무제한으로 찍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카메라를 사주겠다며 살짝 찔러 보곤 하신다.

필름 카메라의 무거운 무게와 얇아지는 지갑을 어느 정도 감수하더라도, 이상하게 필름 카메라 앞에서는 조금은 미련해지고 싶어진다.



아마 아빠가 산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TV 프로그램을 즐겨 보시기 시작하면서부터 집 안 곳곳에 캠핑 용품이 하나둘씩 쌓여갔던 것 같다. 다행히도 먼지가 수복해지기 전에 친구들과 몇 번의 예행연습을 하시며 텐트를 설치하는데 능숙해진 아빠는, 누구보다 설레하며 가족끼리 북한산 쪽으로 캠핑을 다녀오자고 제안하셨다.

차 트렁크는 텐트와 냄비, 라면, 그리고 분위기를 더해줄 와인과 불멍 도구 등 아빠의 설레는 마음에 비례하며 온갖 캠핑 용품으로 가득 채워졌고, 나의 배낭에는 세안 도구와 갈아입을 여벌의 옷 그리고 필름 카메라뿐이었다. 아주 더운 여름이었기에 내 가방에서 가장 많은 부피를 차지했던 건 옷가지가 아닌 필름 카메라였다. 무거운데 쓸데없이 왜 들고 가냐는 아빠의 핀잔도 내 배낭의 무게를 줄이지는 못했다.



내가 태어난 이래로 아빠가 먼저 가족 여행을 가자고 제안하신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그날은 다른 날보다 유독 특별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텐트를 설치하시는 아빠의 모습,

불멍을 피우며 뿌듯해하시는 아빠의 모습.


처음 보는 아빠의 모습 때문인지, 평소보다 아빠가 더 크고 듬직하게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자연스레 배낭 지퍼에 손이 갔고, 배낭에서 필름 카메라를 주섬주섬 꺼내어 아빠 쪽으로 들이밀었다. 어두운 밤에 터진 플래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어색해하며 소심한 브이를 만들던 아빠의 모습이 그곳에 있던 어떤 존재보다 가장 빛나 보였다.



엄마는 아침 식사를 하시기 전과 아침 식사를 하신 후에 달달한 믹스커피 한 잔을 마시는 습관이 있다. 유독 화창하고 따뜻했던 주말의 햇살이 작은 부엌 창을 넘어 들어와 식탁까지 길게 늘어지고서는, 식탁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즐기고 계신 엄마를 비췄다. 갈색빛이 도는 엄마의 머리칼은 햇살을 머금어 더욱 갈색빛으로 물들었고, 웃음을 따라 생긴 눈가 주위의 자잘한 주름이 더 깊고 선명하게 보이면서 엄마가 평소에 얼마나 잘 웃는 사람이었는지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비록 잠옷 차림에 헝클어진 머리이지만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 엄마를 더욱 엄마답게 만들었기에, 평소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는 그 모습을 오랫동안 남기고 싶어졌다. 세수도 안 하고 옷도 엉망이라 사진 찍기 싫다고 하시지만, 필름 카메라 앞에서 금세 다리도 꼬아보고 손을 턱에 괴어보며 내가 아는 어떤 모델보다도 열심히 포즈를 취해보신다.



드르륵 필름 감기는 소리가 들린다. 혹여나 필름을 꺼내다가 빛에 노출되어 그동안 찍었던 소중한 추억들이 다 날아갈까 노심초사하며, 통장 잔고를 확인하듯 아주 조심스레 필름 덮개를 열어 본다. 가지런히 감겨있는 필름을 꺼내어 사진관에 맡기면, 빠르면 3시간 정도 뒤에 이메일 한 통이 날라온다.


“00사진관-현상하신 스캔 파일 보내드립니다.”


필름 카메라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을 제외하고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사진관에 맡긴 결과물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기대되면서도 떨리는 마음으로 메일함을 열어보니 몇몇 사진은 초점이 맞지 않아 약간 흐릿했고, 생각했던 구도와 조금은 다르게 나온 사진도 더러 보인다. 정직하게 예쁘게 나온 사진만 인화할까 하다가도, 흐릿함 속에 살짝 보이는 가족의 얼굴을 보니 괜히 웃음이 나오면서 결국 모든 사진을 인화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70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가서 칭찬해달라는 어린아이같이 기대에 찬 마음으로 곧장 인화된 사진을 들고 부모님께 보여드린다. 아빠는 초점이 안 맞고 포즈가 어색하다며 마음에 안 든다 하시고, 엄마는 화장기 없는 모습이 민망하다며 고개를 저으신다. 70점에 대한 칭찬보다는 나머지 30점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하시면서도, 사진 속에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미세하게 올라간 부모님의 입꼬리를 나는 분명 보았다.

나의 시선으로 찾은 주변 사람들의 빛나는 한순간을 위해 36장의 제한 속에서 신중하게 검지에 힘을 줘본다. 그렇게 나온 결과물을 사진 속 주인공에게 건네주면, 대개는 쑥스러운 마음에 양손으로 사진의 가장자리를 꼬옥 붙잡고서 은은한 미소를 보여준다. 내가 지금껏 좋아했던 것은 필름 카메라 자체가 아닌, 인화된 사진을 보며 마음에 안 든다고 툴툴거리면서도 잠시나마 행복해하는 소중한 사람들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스마트폰만큼 화질이 좋지 않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바로바로 편집할 수는 없지만, 그 대신 필름 카메라의 네모난 세상에는 꽤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소중한 사람들의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으니.

노이즈가 가득한 사진 한 장의 무게에는 그 당시의 햇빛과 온도의 색감, 어색한 포즈와 짙은 주름,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까지 하나하나 전부 담겨있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고 사진을 다시 꺼내 봐도 그때의 순간이 빠르고 짙게 물들어진다.



내가 건넨 사진 한 장이 당신에게 때로는 추억 한 줌이, 때로는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게 된다. 필름 한 컷에 당신의 과거를 담고, 그 사진을 보며 행복해하는 현재의 당신도, 그리고 살다가 지쳐 지난날이 그리워질 때쯤 언제든지 다시 꺼내 볼 미래의 당신까지 담아보며 셔터를 천천히 눌러본다.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필름값이 오를지는 알 수 없지만, 매 순간 분명히 있을 당신이 모르는 당신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나는 또다시 미련하게 지갑을 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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