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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쉬었습니다

by 가담



1분 간격으로 핸드폰이 울려댄다.
엄마 한번 그리고 아빠 한번.
분명 각기 다른 통화였지만
주고받은 내용은 별다를 게 없다.


"푹 쉬어라"


감기에 잘 걸리지 않는 체질이라 자부하지만
이번만큼은 꼬리를 내려야 될 것 같다.
난생처음으로 A형 독감에 걸렸다.


아픈 건 둘째치고 당장 뭘 해야 될지 고민이다.
의무적으로 격리해야 되는 건 아니지만
전파력이 강하다 보니 격리 권고라고 한다.


회사원에게 있어 주말은 약속의 연속이다.
민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 모든 일정 취소.
코로나 이후로 아주 오랜만에
진득하게 나만의 시간을 보낸다.


뭘 해야지 잘 쉬었다고 할까.
어쩐지 온종일 누워서
그동안 보지 못한 드라마나 영화를
잔뜩 몰아봐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선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는 걸 시작으로
첫걸음을 떼보기로 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을 집어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9시 정도 됐겠거니 했는데 고작 7시 반,
첫 계획부터 틀어져 버렸다.
쉬는 날에 걸맞게 다시 눈을 질끈 감았는데
잠이 오기는커녕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는
잡생각 때문에 오히려 정신이 말짱해진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안절부절못하기까지 한다.


치울까, 말까.


전신 거울 밑에 쌓여있는
먼지로 코팅된 책 더미 때문이다.
이마에 난 뾰루지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듯,
무슨 수를 써서라도 눈에 거슬리는
저 먼지 구덩이를 해결하고 싶어진다.


'쉬어야 되니까'라는 문장 속에
나를 얌전히 가두기에는 몸이 근질거린다.
결국 몸을 일으켜 책을 하나씩 닦은 후,
나만의 분류법으로 대강 규칙성 있게
다시 쌓아 올린다.


정리가 끝난 뒤 손에 묻은 먼지를 씻어내면
마음속 언짢음도 함께 흘러갈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또 다른 언짢음이 쌓여버린다.
이번엔 화장실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그렇지 화장실 청소까지는
선 넘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느샌가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고 있다.


그렇게 1시간쯤 지났을까.
드디어 엉덩이를 바닥에 붙인다.
좋아하는 케이크 한 입에
좋아하는 책의 한 구절,
그리고 좋아하는 영화도 한 편 본다.


더 이상 잡생각이 들지 않는다.
작은 집에는 오로지
나와 내가 좋아하는 것뿐이다.


신경이 거슬리는 쪽을 향해 몸을 움직여
마음 응어리를 잘게 흩으러놓은 뒤,
한결 편안해진 마음을 틈 타
할 수 있는 한 끝내주게 늘어지기.
심적인 편안함과 육체적인 편안함,
쉼이라는 단어에 두 가지의 휴식을 담아본다.


이만하면 푹 쉬라는 엄마 아빠의
인사말에 제대로 응한 것 같다.


오랜만에 아주 잘 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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