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전 제임스가 영어 강사로 한국에 처음 왔을 때의 일이다. 그는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를 겨우 말 할 수 있었다. 그때 누군가 “한국말 진짜 잘하시네요!”라고 해 주면 그 말이 참 좋았다. 자신의 노력을 알아 봐 주는 것 같았고, 이 낯선 땅에서 작은 소속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좀 더 한국어를 잘하고 싶고 한국에서 일도 하기 위해 한국어능력 시험 최고 등급을 땄다. OO대학교에서 박사학위도 받았다. 학술 논문을 한국어로 발표하고, 한국어로 강의도 한다. 그래도 여전히 같은 말이 따라붙었다.
“와, 한국말 너무 잘하시네요! 얼마나 공부하신거에요?”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한국 사람인줄 알았어요!”
처음엔 참을 만했다. 아니 어쩌면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말이 주는 불편함은 커져만 갔다. 마치 성장하는 아이를 계속해서 “아기”라고 부르는 것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그 ‘칭찬’은 오히려 더 큰 상처가 되어갔다.
이제 제임스는 한국 국적도 얻었다. 결혼을 해서 아이도 있다. 그러나 얼마 전 고객사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였다. 완벽한 한국어로 30분간 발표를 마쳤다. 박수가 이어졌고, 누군가 또 그 말을 했다.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말 잘하시네요! 정말 대단하세요!”
그 순간 제임스는 깨달았다고 한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무리 한국어를 잘해도,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그는 영원히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으로 멈춰있을 거라는 것을.
10여 년간 한국에서 제임스의 삶은 끊임없이 변화했고, 성장했고, ‘한국화’ 되어갔다. 그런데 사람들의 인식은 여전히 10년 전에 멈춰있는 것 같다.
아침에 마트에서 만난 계산원에게서,
“어머, 한국말 진짜 잘하시네요!”
점심 때 거래처 미팅에서 만난 신규 거래처 담당자에게서,
“한국말 이렇게 유창하시다니!”
저녁 회식 자리에서 처음 만난 다른 부서 직원에게서도,
“10년이나 사셨다고요? 그래서 그렇게 잘하시는구나!”
사회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미묘한공격(Microagression)이라고 부른다. ‘micro(아주 작은)’와 ‘agression(공격)’의 합성어로, 겉으로는 칭찬이나 관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대를 ‘영원한 외부인’으로 규정짓는 보이지 않는 차별을 의미한다.
미묘한 공격/ 미묘한 불평등은 행동이나 표정, 몸짓을 통해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보내는 부정적인 메시지다. 이러한 신호는 감지하기 어려우며, 그 신호를 보내는 사람조차 자신의 행동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내가 강의 때나 일상생활에서 무례하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종종 자주 인용하는 속담이기도 하다. 우리의 선의가 때로는 누군가에게 날카로운 돌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다양성과 포용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뉴스에서도 이런 먼지차별을 다룬 적도 있다.
“그냥 칭찬하는 건데 뭐가 문제야?”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미묘한 공격’의 가장 큰 문제다. 너무 사소해서, 너무 선의에 기반해서, 문제 제기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캐나다 정신건강협회의 연구에서 이런 ‘Microagression(작은 차별)’들이 개인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심각하게 보고한 바 있다. 매일매일 쌓이는 미세한 차별은 스트레스와 불안을 유발하고, 때로는 우울증이나 정체성 혼란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종이에 베이는 것과 같다. 한 번의 베임은 큰 상처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자리를 수백 번, 수천 번 베이게 되면? 결국 깊은 상처가 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처가 겉으로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처 받은 사람은 “내가 너무 예민한가” 라며 자책하게 되고, 주변 사람들은 “별거 아닌데 왜 그래? 라며 그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은 제안하고 싶다.
다음에 ”한국말 잘하시네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올 때,
잠깐 멈추고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이분과 그냥 평범한 이웃으로, 같은 직장 동료로, 그저 한 사람으로 대화를 나누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라고.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포용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누군가를 ‘특별하다’ 고 구분짓는 순간, 이미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우고 있는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