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쯤에 이 영화가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시네필이라고 자청하던 누군가의 말이었다. 입소문을 탔던 터라 보고 싶었지만 영화광인 그 분의 말은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포스터가 그리 끌리지 않았고 시놉도 흥미롭지는 않았다.(그럼, 내가 누군가의 말에 휘둘려서 선택할 사람은 아니다.) 코로나 시대에 넷플릭스와 웨이브의 호갱이 된 나는 지금에 와서야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극장에서 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 영화는 코로나를 뚫고서라도 영화관에서 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상영 내내 마스크를 장착한 채로 테넷을 관람했던 나는 테넷을 제칠 올해의 영화는 단언컨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동성애를 비난 혹은 폄하하거나 동성애 영화라고 해서 거부하는 사람들은 영화로 느낄 수 있는 재미의 폭을 스스로 제한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지금 21세기 아닙니까. 언제까지 색안경을 끼고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비난할 텐가. (화내는 건 아니고 정말 안타까워서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동성애 영화는 제치고 안 본다는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서 내가 먼 훗날 결혼할 상대 혹은 진지하고 성숙하게 연애를 할 상대는 동성애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척 말고 진정성에 우러나온 존중 말이다. 역사적으로 만약 엄청난 권력을 잡은 이가 동성애를 일찌감치 합법화하고 동성애를 장려했다면 지금의 이성애가 이상한 사랑으로 치부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대체 역사를 말하는 수많은 픽션들이 있지만 여러 가정들을 해 본다면 다수가 이성애를 따른다고 해서 이성애만 옳은 것이 아니라 소수의 동성애도 인정을 해 줄 필요가 있단 말이다. 그런 면에서 셀린 시아마 같이 멋진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조금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깨 줄 만한 마스터피스를 만들어내는 이렇게 멋진 사람 말이다.
"생각보다 정말 괜찮은데요?"
지루한 것을 몹시 견디지 못하며 잔잔한 이야기를 싫어하고 생각보다(?) 막장 장르를 좋아하는 나는 MSG 촥촥 뿌린 할리우드 영화도 좋아하지만 나를 불편하게 하는 독립영화도 좋아하는 잡식성 인간이라 취향을 단정 지을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영화에서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하거나 전율을 일게 하는 시퀀스를 발견하면 일단 별점 4점을 주고 보는 사람이라서 90분 중 89분이 잔잔했어도 마지막 엔딩이 좋으면 높게 점수를 준다. 대표적인 예로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보이후드>가 지루했지만 엔딩 때문에 점수를 막판에 높게 준 적이 있다. 물론 나는 대단한 평론가가 아니고 그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지만 그만큼 관객에게 엄청난 감정을 전달하기는 어려운 일이란 말입니다. 히치콕 감독의 <레베카> 리메이크작이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을 때 곳곳에서 혹평이 쏟아졌지만(여주 연기 별로, 남주와 여주 사생활로 비난 등등) '추억을 향수처럼 병에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 때나 열어볼 수 있게.'라는 대사와 여주와 남주의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케미 등등의 요인을 종합해 본 결과, 원작을 보지 않은 저는 5점 만점에 4점을 주었답니다. 너무 사족이 길었으나 결국, 저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5점 만점을 드리겠습니다.
인상적인 구절보다는 인상적인 대목이 많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세 번 전율이 일었다. 첫 번째 전율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처음 만나는 장면. 그저 안녕하세요! 가 아니라 마리안느의 자살을 연상시키는 듯한 시퀀스. 실루엣만 비치던 그녀의 모습이 드러날 때 나풀거리는 바람과 그녀의 표정. 정말 멋진 장면이었다. 두 번째 전율은 엘로이즈의 옷에 모닥불이 붙었을 때, 여자들이 화음을 내며 합창했던 대목. 세 번째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만약 내가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다면 광광 울고 말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봤다. '라는 자막이 나왔을 때 아 두 사람은 극장에서 저 멀리서 눈이 마주치다가 눈물을 흘리는 엔딩이겠지? 하는 다소 뻔한 엔딩을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그녀는 날 보지 못했다.'라는 자막 이후에 클래식이 나오면서 엘로이즈를 점점 클로즈업하는데 그녀가 음악을 들으면서 울기 시작하는데..... 와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극장에 있었더라면 한동안 그 감정에 잠겨 멍하니 있었을 내 모습이 예상이 갔다.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사랑했던, 이루어지지 못한 인간을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면 어떨까..? 실제로 옛 연인과 십 년 만에 만난 이들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영상이 한때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나는 엘로이즈가 음악을 듣고 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엘로이즈는 분명히 마리안느를 보았다고 확신이 들었다. 마리안느와 사랑할 수 없는 복합적인 현실 때문에 운 것이라고, 이 얼마나 슬픈가. 정말 너무나도 슬픈 장면이었다. 이 장면 이전에 마리안느가 엘로이즈가 28페이지를 편 책을 든 채로 딸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이 초상화로 전시되어 있던 대목 후에 마리안느의 모습을 비춘 채로 끝났어도 충분히 여운이 있었다. 영화 5to7에서 브라이언과 마주친 아리엘이 장갑을 벗으며 스리슬쩍 자신의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연상되며 이렇게 끝나는구나 했다. 그러나 감독은 진짜 천재적이었다. 엘로이즈가 음악을 좋아하는 성향을 앞부분에 심어두었던 이유는 엔딩을 위해서였으며 엘로이즈를 보필하는 하녀가 몇 달간 생리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리안느는 그녀에게 이렇게 묻는다. 아이를 원해요? 여성의 주체성, 의지 더 나아가서는 연대에 대해 아주 담백하게 말한다. 셀린 시아마 만세.
좋은 영화를 만든 감독 따라서 그의 필모를 다 훑는 습관이 있는 내가 셀린 시아마 영화 중 제일 처음 접했던 것은 톰보이였다. 내 취향은 아닌 잔잔한 영화였지만 이렇게 잔잔한데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았고 한국 영화 '우리들' 같은 느낌이었달까. 대단한 감흥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다는 느낌을 갖고 '워터 릴리스'를 보았다. '워터 릴리스'는 정말 괜찮았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연상되는 지점도 있었고(마리 역을 맡은 폴린 아콰 르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랑을 세 여자를 통해서 그리는 지점이 인상적이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정말 인물 활용을 인위적이지 않으면서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감독이라고 생각했다. 세 사람의 사랑이 건강해서 좋았다. 사랑 앞에서 자존심 따위 내세우지 않고 건강한 사랑을 하며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표현하는 인물들 사랑한다 정말. 워터 릴리스를 다 보고 나서 이 영화가 감독의 첫 번째 영화였다는 사실을 알고 정말 놀랐다. 2007년에 무려 이 대단한 영화를 만들어낸 감독은 2019년에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칸에서 '기생충'과 맞붙는데 결국 기생충에 영광의 자리를 내주게 된다. 두 작품은 결이 다르지만 만약 '기생충' 이 없었더라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스산한 분위기와 고풍적인 느낌을 영상만으로 전달하기는 정말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과하지 않고 적절하게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분위기를 제대로 전달한다. 이건 마치 춥다고 느끼면서도 옷을 껴 입고 눈밭에서 구르다가 컵라면 한 사발을 들이키며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상태와도 같달까. 컵라면이 아니라면 가락국수 혹은 뱅쇼를 마시는 느낌. 셀린 시아마 감독의 뮤즈는 극 중에서 엘로이즈 역할을 맡은 아델 에넬이었다. 대단한 감독의 뮤즈이자 애인이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되어보지 않으면 모를 느낌이겠지. 아직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 '걸 후드'는 보지 못했지만 관람 전에 미리 5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