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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보카도 Jul 04. 2022

잔잔한 흑백영화 <컴온 컴온>

육아의 고통과 성장을 말하는 가족영화 <컴온 컴온>


개인적으로 흑백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밋밋하고 지루하기 때문이다. 흑백 영화 중 인상적으로 봤던 영화는 <하얀 리본>과 <프란시스 하>였다. <하얀 리본>은 너무 잔잔한 나머지 보다 졸기도 했지만 <프란시스 하>의 경우, 20대의 흔들리는 청춘을 잘 그려낸 영화여서 감탄하면서 보았다. 그때도 의문은 있었다. 굳이 컬러를 놔두고 흑백을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흑백은 다큐멘터리적 특성과 동화라는 두 가지 요소에 모두 어울리며 친밀한 느낌을 주면서도 여지를 준다고 한다. 등장인물들을 시간의 흐름에서 끌어내어 일상생활에서 멀리 떨어지게 한 다음 이미지를 그림처럼 바꿔 보여주는 것이라고 마이클 밀스 감독은 인터뷰한 바 있다. 그렇다. 흑백은 리얼리티를 전달하는 데에 효과적이다. 실제로 영화 <컴온 컴온>의 주인공 조니는 라디오 다큐멘터리 저널리스트로 나온다. 아이들의 생각을 묻는 인터뷰를 하면서 조카 제시와 함께 미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라디오 저널리스트이다 보니 실제 미국 청소년들의 대본 없는 인터뷰가 영화 곳곳에 등장한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와중에도 '외계인의 존재를 믿어요?'에 대한 아이들의 순수한 답변들이 올라온다. 답변은 예상 밖의 답변들이 많고 평범하지 않은 답변들이 많다. 영화 중간중간에 삼촌으로 나오는 호아킨 피닉스가 조카에게 책을 읽어주는 장면들도 있는데 저장해 두고 싶은 구절이 몇몇 있었다. 마이클 밀스 감독은 흑백 영화라는 양식과 다큐멘터리라는 양식의 결합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컴온 컴온>을 통해 궁극적으로 '육아의 위대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컴온 컴온>은 조카와 삼촌이 여행을 통해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다. 영화 제목 <컴온 컴온>은 조카 제시의 대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다소 어른스러운 제시는 '카르페디엠'에 버금가는 현재를 살라는 뉘앙스의 말을 던진다. "계획한 것들은 이루어지지 않을 거예요. 예상치 못한 일들이 펼쳐질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해봐요. Come on, come on, come on, come on."  인생은 원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MBTI ENFP인 나는 평소에 계획을 세우고 살아가지 않는 사람으로서 이 대사를 들었을 때 '난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을 세우지 않고 그냥 먼저 해 보는 인생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인생은 무작정 저지르고 보는 인생의 묘미가 상당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물론 직장인이기 때문에 회사생활 루틴 안에서는 그 루틴을 벗어나는 일을 할 수는 없지만 회사생활 이외의 생활에서는 계획 없이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등등 텐션 높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요 근래 내게 벌어진 제일 예상치 못한 일들은 교통사고였다. 내비게이션이라는 도구의 도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통사고는 일어나버렸고 보험사를 부르고 상대 차주와 대화를 나누는 등등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내 인생의 드라마틱함이 운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사족이 너무 길었다. 다시 영화 본론으로 돌아와서 조카 제시는 여느 드라마, 영화에 나오는 성숙한 아이 캐릭터와 겹치는 면이 많다. 최근에 재미있게 본 <우리 이혼했어요 2>의 일라이, 지연수의 아들 민수 같기도 했으며 <동백꽃 필 무렵>의 필구 같기도 했다. 조울증에 걸린 아빠의 병시중을 드느라 정신이 없는 엄마 때문에 삼촌에게 맡겨졌다는 설정 자체만으로 아이가 얼마나 부모의 눈치를 많이 보고 자랐을까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고 완전 애어른은 아니다. 갑자기 숨바꼭질을 하는 등 삼촌 조니를 놀라게 하게도 하고 떼를 쓰기도 하는 등 그 나이대 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이 캐릭터는 입체적이어서 너무 좋았으나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조니 캐릭터가 다소 아쉬웠다. 시종일관 진지하고 결핍이나 결여가 보이지 않는 캐릭터여서 아쉬웠다. 그리고 조니가 제작하고자 하는 라디오 다큐멘터리의 주제나 윤곽이 너무 중구난방으로 영화 곳곳에서 스며들어있어서 혼란스러웠다. 라디오 다큐멘터리의 방향성이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면 그 주제에 몰입하며 영화를 볼 수 있었을 텐데 미국 이민자 이야기가 나오다가 디트로이트 시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다가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다가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까 너무 당황스러웠다. 라디오 다큐멘터리 창작자라는 너무 좋은 직업 설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 많아서 다소 밋밋한 이야기의 진열로만 전락하고 말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서 문득 생각이 났던 영화가 <세인트 빈센트>였다. 엄마와 단둘이 새 집에 이사 온 올리버가 첫날부터 옆집의 빈센트라는 할아버지와 악연을 맺게 되지만 둘은 아웅다웅하닫가 둘도 없는 버디로 재탄생하게 되는 이야기. 로그 라인만 들어도 살포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아니한가. 특히 이 영화의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에 나오는 빌 머리에 버전의 밥 딜런의 Shelter from the storm 이 압권이다. 빈센트 할아버지가 술, 도박 등 문제가 있는 사람이지만 의외로 따뜻한 면이 있어서 아이와의 케미가 좋았던 영화다. 어찌 보면 흔한 소재라고 볼 수도 있지만 결핍이 있는 캐릭터들이 만나서 벌이는 대소동극에서 오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나는 개인적으로 <세인트 빈센트>가 <컴온 컴온>보다 좋았다.


호아킨 피닉스와 조카로 분한 배우의 케미가 조금 아쉽기도 했고 로드무비 치고 그렇다 할 장애물도 없이 너무 평탄하게 이야기가 흘러갔다는 점도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영화 <멋진 하루>처럼 조금은 다이내믹하고 드라미틱한 설정과 관계를 원했던 나 같은 관객에게는 아쉬움이 많은 영화지만 흑백 영화의 질감을 사랑하고 흑백영화를 예찬하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영화일 것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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