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터미널 같은 쿠바 공항. 여기도 체 게바라?
누구나 영웅을 좋아한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신화와 전설 속에서 영웅을 보아왔고 영웅이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죽어갔는지 영웅은 어떠한 요소를 갖추어야만 될 수 있는 위대한 인물인지 일주일에 네 번꼴로 국어시간에 배워왔다. 그리고 학기 중간 혹은 학기 말에 시험을 통해 영웅의 선결 조건을 알고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누곤 했다. 전자는 시험이라는 판결에서 승리를 하게 되고 후자를 패하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전우치와 홍길동을 잘 아는 자와 피상적으로 아는 자를 나누어왔던 것이다. 영웅, 그 이름만 들어도 웅장하고 가슴 벅차오르는 그는 여전히 쿠바에 존재한다. 쿠바인의 가슴에, 쿠바인의 다리에 촘촘히 박혀있다. 체 게바라는 쿠바의 곳곳에 박제되어 있었다. 쿠바의 돈에는 체 게바라가 새겨져 있고 하바나의 상점에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옷들이 진열되어 있으며 거리의 화가들은 입을 앙다문 체 게바라의 얼굴을 끊임없이 그리고 팔고 있었다. 곳곳에 진열된 체 게바라 우상화를 보고 나서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체 게바라는 상품이 되어 곳곳에 팔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공항의 허름한 면세점에도 체 게바라 관련 의복, 체 게바라 관련 열쇠고리들을 팔고 있었다. 여태까지 많은 나라들의 공항을 가 보았지만 쿠바 같은 공항은 처음이었다. 온통 빨간색으로 도배된 이 허름한 공항에서 다음날 새벽 6시까지 밤을 지새워야 했다. 열두 시간 동안 와이파이도 안 되는 공항에서 아이팟만 만지작거리는 것은 따분한 일이었다. 뭘 할까 고민을 한참 하다가 암담해졌다. 여기는 맥도널드도 없었고 서브웨이도 없었다.
쿠바로 출국하기 전, 멕시코 친구 felipe는 내게 거기는 맥도널드가 없으니 마지막으로 맥도널드를 먹고 가라고 했었다. 그때 나는 ‘에이 겨우 5일인데 맥도널드쯤 없으면 어때.’라고 생각했는데 저녁 시간이 다가오고 배가 꼬르륵거리자 모든 것이 있는 멕시코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쿠바 정부에서 운영하는 면세점 내 가게는 제한된 음료수, 과자, 아이스크림만을 팔고 있었고 나는 저거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었다. 가진 돈이라고는 쿠바에서 출국할 때 내야 하는 25 쿡뿐이고 가지고 있는 달러를 바꾸자니 환율을 적게 쳐 줄 것 같아서 남은 멕시코 돈 50페소를 쿠바 돈 쿡으로 바꿨다. 3.55 쿡으로 아이스크림 하나, 과자 하나, 초콜릿 하나를 사고 나니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쿠바에는 콜라도 코카콜라 외에는 ciego monterro라는 정부에서 만들어낸 콜라 밖에 없었다. 페루의 잉카 콜라나 한국의 펩시콜라를 기대하는 건 사치였다. 코카콜라라는 브랜드가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했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공항 1층 2층을 왔다 갔다 하다가 아이팟을 충전하기 위해 콘센트를 찾아 헤맸다. 세상에 콘센트가 하나도 없었다. 다행히 공항 내에 인포메이션 센터는 있었고 그곳에 가서 충전하고 싶다고 했더니 직원이 친절하게 충전을 하게 해 주었다. 너무 고마워서 고맙다고 했더니 그녀는 내게 어디서 왔냐고 했고 나는 ‘꼬레아 델 수르.’라고 했더니 그녀는 반겨주었다.
배터리가 충전되고 있는 사이, 그녀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에게 쿠바의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그녀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펜을 꺼내 들며 ‘no’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월급이 겨우 15 쿡인데 아이가 두 명이 있고 한 달에 생활용품을 사는 데에 10 쿡을 쓰고 나면 남는 건 5 쿡뿐이라고 했다. 히수스 엄마가 말한 것처럼 그녀의 월급은 쿠바 내에서 괜찮은 편이었다. 그래도 근근이 힘들게 살아간다고 했다. 안타까웠지만 나는 어떤 도움이 될 수도 없었다. 히수스 엄마가 불만을 토로할 때 바뀔 수 있다고 희망 없는 말들만 던졌던 것처럼, 바라데로의 할머니가 어쩜 그럴 수 있냐고 같이 역성을 들었던 것처럼, 슬프다고 어떻게 방법이 없냐고 되묻는 수밖에.
그녀는 내게 엄청 많은 돈을 가지고 쿠바에서 한 달 동안 살고 나면 왜 바뀌는 게 불가능한지 알 거라고 했다. 쿠바의 현실을 알면 알수록 불편함의 정도는 커져만 갔다. 내가 지불하는 돈은 전부 쿠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부에 납부하는 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사람들을 도와줄 수도 없었다. 178 쿡만 갖고 있었던 내가 5일 동안 잠을 자고 곳곳을 누빌 수 있었던 이유는 히수스네 엄마와 히수스, 까미요 형제 덕분이었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