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만큼 참았다. 애써 모른 척하며 무딘 척해 왔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질 못하겠다. 날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보며 썩소를 날리고 비웃음을 날리고 흥 거리며 위아래를 훑고 내 약점을 잡아서 신경전을 벌이고 내가 없는 틈을 타 화분 위 나무가지를 잘라서 거꾸로 놔두고 그렇게 해도 나는 그러려니 하는 마인드를 장착하고 살아오려고 애썼다. 아니 어쩌면 증거가 없어서 '발끈' 할 수 없었다. 증거 없는 발끈은 농락 거리가 되기 쉬운 법이니까. 그때 화분 지문 감식이라도 해서 물증을 가지고 있으며 투쟁하듯 나의 결백함과 상대의 나쁨을 증명해 보였으면 지금의 내가 느끼는 절망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을까. 나는 많은 피해자들 중 한 명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뇌 MRI를 찍은 사람도 있었고 자존감이 바닥나서 주눅 들다가 나간 사람도 있었으며 대놓고 비웃는 그들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모르는 척했던 이들도 있었다. 하긴 나도 내 눈에 '독기'가 있다며 '독기 독기' 거리는 소리를 듣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아서 친구에게 연락하며 소스라쳤던 적이 있었다. '대놓고' 아닌 척하며 '은근히' 그런 행동을 한두 명한테 일삼은 게 아니었다. 대개 그들은 울음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으며 내가 힘들 때는 가만히 있더니 이제 와서 왜 도와주겠다고 하느냐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저마다의 사정들도 나중에는 다 웃음거리가 되어 소문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며 나는 이 곳은 악한들의 세계라고 판단했다.
내가 자문을 구했던 사람들은 양반들이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고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같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이 굴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결국 당사자는 '가마니'가 되고 만다. 이 구역의 병신이 되는 것보다 이 구역의 미친년이 되는 게 낫다고 한 선배가 그랬는데 피곤하니 '미친년' 이 되지는 못하겠다. 나를 모르는 너의 눈에는 나쁜 평판으로 점철된 이미지로 인해 내가 '미친년'으로 보일는지는 모르겠다. 무서운 행동은 자신들이 해 놓고 내가 '발끈' 하면 나보고 무섭다고 하더라. 거울을 보고 스스로를 들여다보면 당신 눈동자 속 악마의 씨앗을 발견하게 될 텐데 이게 더 무섭지 아니한가. 그리고 또 한 마디 덧붙이더라. '너는 피해의식이 있구나.' 피해를 입었으니 피해의식이 있는 건 당연하지 않나. 원인제공자는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한 채 그렇게 자신 탓이 아닌 남 탓을 하더라.
'퇴사'를 수십 번 고민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사람들은 '타의적인 이유로 퇴사자가 되지 말라.'라고 했다. 너의 자발적 의사로, 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어떤 이유로 퇴사를 하는 것이라면 응원하지만 타의적인 이유로 퇴사를 할 경우, 그들은 더욱 기고만장해질 것이라고 했다. 여태까지 은근한 조롱과 비웃음, 괴롭힘으로 인해 나가떨어진 아무개들이 잊혔듯이 내가 퇴사했더라면 나도 '걔가 누구더라.' 하는 그 아무개 중 한 명이었을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버텼다. 요즘 용어로 '존버'하느라 힘들었다. 그렇게 '존버'하다가 요즘 부쩍이나 힘들다. 내가 힘든 걸 알면 자존심이 상해서 안 힘든 척했는데 요즘은 힘든 걸 알아도 상관없을 정도로 '척'을 할 수 없는 지경이다.
동기 말로는 내가 '여론전'에서 이미 졌다고 했다. 나는 정작 전쟁을 한 적이 없는데 여론전쟁이라는 것을 이미 그들과 치렀고 나는 루저가 되었다. 내 피해를 낱낱이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공 수업 시간에 승소 판례를 보면서 피해자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이를 증명하기 위해 애썼을까 하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는데 처음으로 그 생각을 했다. 명백한 증거가 필요한, 복잡한 일이었겠구나. 법적으로 소송할 생각도 의지도 없다. 물증이 없으니까. 판례 속 당사자들의 사연을 깊게 들여다보지는 않았지만 그쪽 변호사와 당사자는 자신의 피해를 증명하기 위해 처절하게 물증을 수집하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비참한 심정이었을까. 치밀하지 못한 나는 동기 말대로 '여론전'에서 졌다. 그렇지만 당신들로 인해 오명을 입은 내 구렁텅이 같은 이미지를 이제 참고 있을 수만은 없다. 가만히 있다가는 구렁텅이는 물론이거니와 '쓰레기'로 전락해 버릴 것만 같다.
나는 쓰레기가 아니다.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살아오기 위해 애썼고 당신들이 씌우고 싶은 '쓰레기' 이미지와 달리 '쓰레기'를 멀리 하라고 배웠다. 그래서 나는 '쓰레기'일 수가 없다. 그래서 당신들의 '쓰레기' 같은 행동을 이해해 보려고 애썼지만 이해하기도 어렵다. 당신들 역시 누군가의 귀중한 자식이듯 나도 누군가의 귀중한 자식으로 자라왔다. 사랑하는 부모님의 가슴에 피눈물 날 만한 행동을 하기도 싫어하는 착한 딸로 자라왔고 늘 '참으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왔다. 성선설을 믿었던 내가 성악설 신봉자로 바뀐 것 역시 당신들의 막돼먹은 행동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들의 악한 입과 혀놀림이 어디까지 뻗쳤을지 궁금하다. 지금도 손놀림과 입놀림으로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깎아내리느라 분주할 것이 눈에 그려진다.
오랜만에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 마음이 이렇게 피폐해진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대뜸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하셨다. 너무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라고.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할 것이라고. 내 친구의 말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너의 옳음을, 너의 바름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돼.'
잠언급의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렇게 내 속으로 삭이고 애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나는 결국 쌀 한 가마니만도 못한 쭉정이만 가득 찬 가마니가 되고 말았다. 가마니인 내가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막장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10년 후에 짜잔 하고 나타나서 멋있게 복수를 하던데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라서 계속 나는 '가마니'로 살게 될까. 신을 믿지 않지만 어딘가에 정의의 여신이 계신다면 굳이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되니까 제가 '가마니'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세요. 간곡하게 요청드립니다. 어딘가에 계실 정의의 여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