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하면 다들 마추픽추와 우유니를 흔히들 떠올린다. 나는 사실 마추픽추 자체가 좋았다기보다 마추픽추를 가기 위해 들른 쿠스코가 너무 좋았다. 아르헨티나에서도 우연히 들른 코르도바의 아늑함이 좋았듯이 쿠스코의 쌀쌀함이 좋았다. 더운 건 못 참지만 추운 건 즐기는 편이다. 목을 돌돌 감는 목도리나 몸을 덥혀주는 털이 주렁주렁 달린 옷으로 발열해가며 코끝을 스치는 추위와 마주하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쿠스코 산페드로 시장에 가서 따뜻한 닭죽을 먹으면서 몸을 덥혔고 삶은 옥수수를 한 입 베어 문 채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고 걸어 다니는 게 너무 좋았다. 쿠스코의 한 호스텔에서 카메라를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쓸쌀함 때문인지 늦가을이나 초겨울에는 쿠스코의 차가우면서도 따뜻했던 기억이 내 마음을 울린다. 좁은 경비행기 안에서 나스카 라인을 담아보겠다고 셔터를 눌러대고 영상까지 찍었는데 그 사진들을 백업시켜놓지 못했던 나는 호스텔에서 카메라를 도둑맞았다. 그 이후 사진들을 백업시켜놓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는데 자리를 비운 10분 사이에 호스텔의 누군가로부터 카메라를 도둑맞았다는 사실이 분했으나 증거가 없어서 어느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내 탓이오 할 수밖에. 그래도 그때 인생은 참 알 수 없다고 느낀 게 액땜을 한 탓인지 그 이후에 좋은 인연들을 많이 만났다. 카메라를 파는 곳을 수소문해서 들른 곳에서 학생인 내가 살 수 있는 카메라는 건전지를 끼워서 쓰는 카메라였다. 건전지를 넣어서 쓰는 카메라는 처음이라서 낯설었지만 의외로 카메라의 색감이 토이 카메라 마냥 좋아서 찍으면서 만족해했다. 이전의 좋았던 카메라는 화질이 너무 선명해서 민낯이 들통나는 느낌이었으니까.(그렇지만 내 카메라를 잃어버린 것은 너무나도 분한 일이었다.) 남미의 본격 여행의 출발을 페루에서 해서인지 나는 페루에서 사건사고들이 많았다. 와라스에서도 여행사 사기를 당할 뻔했으나 당했다가 사기를 당한 것을 되갚으며 신기한 경험을 했다.
돌덩이들이 마구마구 쌓여 있는 마추픽추 앞에서 드디어 사진을 찍었다!! 나는 어찌 보면 과정보다 결과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이지만 여행지에서의 나는 과정 예찬론자였다. 마추픽추보다 마추픽추를 보러 가는 과정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걷기 예찬론자인 나는 제일 값싼, 사서 고생하는 일정을 택했다. 엄밀히 따지면 돈이 많이 없는 학생이기도 했고 굳이 잉카 트레일을 탈 필요성을 못 느꼈다. 우유니를 혼자 돌면 미아가 되어서 소금기에 전 신발이 될 수 있듯이, 마추픽추 역시 혼자서 갈 수 없는 곳이었다. 나는 여행사 중 사람이 꽤 있어 보이고 주인의 인상이 착해 보이는 곳을 택했다. 마침 한국인 부부가 있었고 한국인을 좀처럼 만나지 못했던 나는 반가워하며 이것저것 물었다. 일단 히드로 일렉트리카까지 가는 봉고에 탑승하는 방법을 택했다. 7시간 정도 벤을 타고 히드로 일렉트리카까지 이동한 후, 아구아스 깔리엔떼까지 기찻길을 따라 3시간 트래킹 하는 것이었다.
여행 중에 비록 나는 커플이 되지 못했지만 커플들과 함께 했던 순간이 몇 번 있었다. 이카에서 사막투어를 할 때에도 그랬으며 우유니에서 투어를 할 때도 그랬고 아구아스 깔리엔떼로 가는 트래킹에서도 콜롬비아 커플 친구들과 함께 했다. 트래킹을 3시간 같이 했을 뿐이지만 친구들이랑 연락처를 교환했고 나는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이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사실 처음 기찻길을 걸을 때는 막막했다. 중간에 비도 왔고 깜빡 쟁이인 나는 우산을 식당에 놔두고 오는 바람에 멘붕 연타를 맞았다. 멕시코 교환학생 때 만났던 sonia를 만나기 위해 전체 남미 여행 일정 중 일부를 콜롬비아 여행으로 잡았던 나는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쏘냐가 살고 있는 바랑키야에는 결국 가지 못했다. 대신 같이 트래킹하면서 친해졌던 친구들이 휴가를 내고 보고타 공항까지 픽업을 나와 주었으며 보고타에 머물 동안 숙소를 제공해 주었고 바나나전을 구워주었다
심지어 같이 보떼로 미술관에 갔다가 보떼로 님을 실제로 뵙고 사진까지 찍는 영광을 누렸다고 한다. 따뜻한 친구들 덕분에 비가 오는 와중에도 즐겁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아구아스 깔리엔떼에 도착했다. 아구아스 깔리엔떼에 도착해서는 그 친구들과 안녕? 하고 나는 나의 길을 갔는데 가는 숙소마다 풀이어서 나는 어쩌나 하고 있는데 한국인 부부가 자기네 호스텔을 알려주셔서 더블룸을 25 솔에 묵게 되었다. 결혼기념일 30주년 기념으로 여행을 오셨던 부부였는데 아주머니, 아저씨 두 분 다 성격이 너무 좋으셨고 같이 중국 음식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발이 퉁퉁 부은 채로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갈 수 있을까 하며 잠을 설쳤는데 마추픽추는 무조건 아침 일찍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내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는지 새벽 다섯 시 반에 눈을 떴고 여섯 시 반쯤 마추픽추 입구에 들어갔다. 그리고 걷고 또 걸어서 1시간 반 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마추픽추보다 1시간 반 동안 걸으면서 산의 정기를 느끼고 자연과 동화되는 느낌이 정말 좋았다. 햇살 한 줄기, 살랑거리는 바람. 안개가 점점 걷히자 구름이 드러났고 새들이 지저귀고. 캬아.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8시에 마추픽추에 도착한 나는 혼자서 위로 올라갔다가 잉카 다리라는 곳에 들러서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내려가려는데 저녁을 함께 했던 아저씨, 아주머니 부부가 부르시더니 막 사진을 찍어주셨다. 알파카랑 뽀뽀하는 웃긴 사진까지 찍어주셔서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돌아올 때도 역시 벤을 타고 돌아오는 방법을 택했는데 오후 1시 30분까지 도착하지 못하면 차가 떠나버릴까 봐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벤에서는 멕시코시티에 살고 있는 멕시코 사람을 만나서 신나서 막 수다를 떨었고 유일하게 한국인이었던 나의 어설픈 스페인어 발음에 운전기사 아저씨 비롯 모두가 내 발음을 흉내 냈다. 스페인어 학원에서도 그랬지만 나는 아르르르르 하는 오토바이 소리 내는 발음이 잘 안 되어서 내 스페인어 발음은 정말 후지지만 발음에 상관없이 생존 스페인어를 마구마구 쓰곤 했다. 어김없이 노스 코리아에 대한 질문을 받으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가 사랑하는 쿠스코에 다시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