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든 드라마든 올해 본 콘텐츠에 대한 결산 어워드도 해야 하고 노트북이 망가져서 수기로 썼던 여행기도 보완해서 올려야 하고 시차 적응도 해야 하고 오스트리아 후유증으로 정주행 했던 비포 트릴로지에 대한 리뷰도 써 보고 싶고 서른하나가 되어서는 계획을 좀 세워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보려고 한다. 기생충에서는 계획의 유무로 계급에 대한 시각을 펼치기도 했는데 그렇게 따지면 나는 20대 중반 언저리부터는 계획 없이 살아가는 인생을 살아왔다. 엄마는 말씀하셨지. 딸아, 역시 너는 계획이 다 없구나.
혹자에게는 이순신이나 세종대왕이 대단한 위인이겠지만 나에게는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사람이라서 언젠가부터 엄마의 말은 꼭 귀담아듣는 편인데 엄마가 내게 경박스러워 보인다고 'ㅋㅋㅋ'를 '제발 좀' 그만 쓰라고 했다. 엄마가 그렇게 말하니 아빠도 그렇고 동생도 그렇고 가벼워 보인다고 'ㅋㅋㅋ'를 쓰지 말라고 했다. 내가 시도 때도 없이 'ㅋㅋㅋ'를 써서 진지함이라곤 1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ㅎㅎㅎ'를 썼더니 'ㅎㅎㅎ'도 쓰지 말라고 했다. 'ㅎㅎㅎ'도 쓰지 말고 'ㅋㅋㅋ' 도 쓰지 말고 건조하게 문장으로만 쓰는 건 아직까지도 힘들지만 싫다니 별 수 있나. 누군가는 내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를 쓰는 게 정감 가서 좋다고 했는데 제일 가까운 가족이 싫다고 하니 쓰지 말아야겠다. 'ㅇㅅㅇ'를 트레이드 마크로 사용하는 내 친구에게 'ㅇㅅㅇ'가 어떤 의미인지 몰랐던 나는 왜 자꾸 그걸 쓰냐고 물어봤던 적이 있는데 그와 비슷한 의문이 드는 것일까. HAHAHAHAHA 나 JAJAJAJAJA도 가벼워 보일까. 솔직히 아직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왜 'ㅋㅋㅋㅋㅋㅋ'가 가벼워 보인단 말인가.
나는 진지하면서도 가벼운 사람이다. 밀란 쿤데라의 책에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란 책이 있듯이 나는 진지하면서도 가벼운 면이 있는 사람이라서 너무 진지하면 따분하게 받아들이고 너무 가벼우면 신중하지 못해서 기피하는 편이다. 인간은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는 법이라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나는 그다지 어른스럽고 성숙한 사람은 아니다. 서른이 되면 조금 더 어른스러운 삶을 살아야만 할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돌이켜 보면 이전과는 별 차이 없는 삶을 살았고 쓸데없는 생각은 더욱 많아졌고 독서량은 더 줄었고 말재주는 더욱 형편없어졌고. 발전을 해야 인간인 것 같은데 점점 퇴화하고 있는 느낌이다. 결과적으로 서른이라는 내 나이가 내게 가져다준 것은 압박감뿐이었지 희망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내일, 서른 하나가 되고 나서는 이 나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아빠의 눈에 나는 여전히 철없는 아이겠지만 철 없이 살아가는 것도 나의 정체성 중의 하나라면 그렇게 살아가려고 한다. 남에게 피해만 끼치지 않는 선에서 나의 철없음을 내 바운더리 안에서 발휘하는 것은 상관없지 않나. 그리고 사회의 규율과 시선에 덜 얽매이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스무 살 때 남들 다 대학 갈 때 대학 갔고 학점은 엉망이어도 남들이 하는 건 학교에서 다 해 봤고 어쨌든 취업은 했고 한국 사회에서 치러내야 하는 통과의례들은 치러냈으니 결혼이라는 과제는 정말 내 마음이 동할 때 할 것이다.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안 하면 그만이다. 여행하면서 제일 부러웠던 커플 중의 하나는 부모님이 베네수엘라인인 캐나다인 남자와 부모님이 대만인으로 추정되는 캐나다인 여자가 퇴사 후 각자 여행하다가 프라하에서 만나서 그 이후로 쭉 같이 여행을 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어떻게 같은 국적과 같은 환경에서 자라온 이들이 만날 수 있나 하는 생각에 부러워 죽는 줄 알았다. 어찌 생각해 보면 너무 기적적인 상황이라서 비포선셋에서 제시와 셀린도 9년이 지나서도 감정이 동해서 비포 미드나잇 같은 상황에까지 이르렀던 걸까.
솔직히 모르면서도 알겠다. 결혼은 안 해 봤어도 결혼 이후에 올 권태가 뭔지 대충 예상도 가고 육아를 하는 이들을 보면서 느끼는 답답함과 우울함을 굳이 내가 결혼 후 육아라는 것으로 인해 느끼고 싶지도 않고 100세 시대에 나만 바라볼지 아닐지 모르는 상대를 붙잡고 나에 대한 애정을 구질구질하게 확인하면서까지 맞춰 살고 싶지도 않다. 생각해 보자. 어떤 노래의 멜로디가 좋아서 그 노래만 주야장천 1000번 들으면 그 노래가 안 질리는가. 어떤 과자가 맛있어서 그것만 365일 먹으면 안 물리는가. 질림과 물림은 상대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해당되는 문제다. 결혼은 사랑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의리의 문제고 '관계의 확장'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결혼에 있어 '조건'을 본다고 하는 이들을 폄하하는 경우가 많은데 연애에서는 '조건' 안 보나.(그런 애들이 조건 본다고 솔직히 말하는 애들보다 더 얌체같이 따지더라.) 연애 시장에서도 우리는 외모든 학벌이든 능력이든 성격이든 가치관이든 그 모든 것들이 조건이고 은연중에 자신만의 조건으로 상대에게 끌려 왔다. '끌림' 은 결국 은연중에 내 '기호'(라고 표현되는 조건의 집약체)와 '호감' 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에게 그 조건 때문에 반하고 만나 왔으면서 여자든 남자든 결혼 적령기에 '조건'을 보는 것을 샐쭉대는 이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당신도 더 좋은 조건의 이성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진정 없는지. 좋은 조건이 좋은 인성을 담보해 주지는 못하지만 좋은 인성이라는 것 역시 내가 궁예가 아닌 이상 어떻게 관심법으로 상대의 열 길 물속이 아닌 한 길 사람 속을 알고 '이 사람은 좋은 인성을 지녔군'이라고 확신을 가질 수 있겠냐는 말이지. 여하튼 문제의 핵심은 '조건'을 따지면서도 결혼 상대를 찾는 것도 정말 피곤한 일이다. 그 시간에 내 행복을 위해 나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하나 더 찾아서 먹을 것이고 내 눈이 즐겁기 위해서 지금 보고 있는 킬링 이브 에피를 한 편이라도 더 볼 것이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비혼을 선언했다가 3년의 휴지기 이후 짝꿍을 만나 샤랄라 해피 해피하며 살고 있는 사람도 봤으니 짚신인 내게도 짝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언젠가 하늘에서 툭 하고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찬란한 미래를 꿈꿔보고자 한다.
누구의 말마따나 결혼을 전제로, 결혼을 생각하고 만날 것이 아니라 '만나다 보니 그토록 생각하기도 싫었던 결혼이 너라면 한 번 해 보고 싶더라'가 조금 더 행복한 생각이겠지. 결혼을 하지 않아도 좋아. 운명을 만나지 않아도 좋아. 그냥 나는 지금의 내가 좋고 앞으로 나 스스로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 '서른'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서른하나'의 나는 조금 더 나답게 재미있게 살아보겠다고 다짐한다. 후회 없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