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덕후였던 내가 미국 드라마 덕후가 된 건 친구 영향이 컸다. 미드 덕후인 친구 추천으로 처음 접했던 미드는 '그레이즈 아나토미'였다. 일본 만화 '테니스의 왕자'가 산으로 갔듯이 '그레이즈 아나토미'도 결국 산으로 가버렸지만 내 첫 미드여서인지 애정 할 수밖에 없는 드라마가 되었다. 로맨스, 판타지, SF 마니아인 나와 달리 친구는 추리물이나 장르물을 좋아했고 '트루 디텍티브' 나 '슈츠' 그리고 '굿 와이프'를 정말 좋아라 했다. 애석하게도 나는 셋 다 그냥 그랬다. '트루 디텍티브'의 경우 매튜 맥커너히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인터스텔라>를 통해 그를 기억하겠지만 내게 그는 인생 영화에 준하는 <머드>와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 나왔던 배우였다. 두 영화를 보고 각기 다른 이유로 울었던 나로서는 그가 나왔다는 이유로 트루 디텍티브는 꾸역꾸역 참아가며 봤다. 그가 열연했던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에이즈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한 남자의 이야기로 장 마크 발레 감독이 연출했다. 장 마크 발레 감독의 필모를 들여다보면 최근작은 평타 이상이었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와일드>, <데몰리션> 모두 저마다의 아픔이 있는 인물들의 속사정을 그리고 있다. 영화들이 좋았던 것은 분명 하나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는 메튜 맥커너히의 연기가, <와일드>에서는 리즈 위더스푼의 연기가, <데몰리션>에서는 제이크 질렌할의 연기가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이번 미드 <빅 리틀 라이즈>에서는 관록 있는 배우들의 연기도 연기지만 연출이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연기 역시 연출의 일부지만 연기력이 뛰어난 연기자들이 대거 등장하는 가운데 세심한 연출이 눈에 띈다. OST가 음악 맛집이라고 할 정도로 좋고 바다가 보이는 집이 즐비한 몬터레이에서 조깅을 하는 인물을 노래와 연계해서 표현해내는 지점과 파도와 인물의 심경을 대비해서 표현하는 연출, 경찰의 수사를 받으며 증언하는 인물들의 증언과 실제 상황을 교차 편집하는 지점이 흥미로웠다. 다만, 3편까지는 조금 지루할 수 있으니 참고 견뎌야 한다. 오래전에 추천받은 미드였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빈 지 뷰잉으로 시즌1을 정주행 하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이 드라마를 보게 된 이유는 <리틀 드러머 걸>에 나온 배우,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때문이었다.
가스라이팅, 너무나도 무서운 말 아닌가
어제오늘, 가스 라이팅이란 단어가 연일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가스 라이팅이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로 가스 라이팅을 당하는 당사자는 자신이 가스 라이팅을 당하는 줄도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니콜 키드먼은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로부터 가스 라이팅을 당해서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하면서도 이런저런 사실들을 부정한다. 겉으로 보면 제일 행복해 보이는 인물은 셀레스트(니콜 키드먼)이었다. 사업하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고 쌍둥이를 키워내면서도 남편과 뜨거운 애정행각을 서슴지 않는 인물로 몬터레이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셀레스트는 폭력과 강간을 일삼는 남편으로 인해 두려움에 떨면서 살았고 체면치레 때문에 친한 사람에게 그 사실을 말도 못 하는 가녀린 여자였다. 게다가 시즌 2에 이르러 그 자극이 없으면 권태롭다고 생각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을 보면서 가스 라이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스 라이팅은 스톡홀름 증후군과 비슷한 심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스 라이팅'을 당하면서도 당한다고 인지를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주변에서 말을 해 주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당사자가 자신의 '가스 라이팅' 당함을 인지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털어놓기도 민감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셀레스트도 남편이 그런 사람인 줄 어찌 알았으랴.
원래 메릴 스트립 엄청 좋아하는데 시즌2에서 연기를 너무 잘 해서 얄밉다.
이 드라마를 <위기의 주부들>과 비교하는 경우도 꽤 많은데 결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불륜' 이 지배적인 테마라기보다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흔한 속설에 의문을 제기함과 동시에 '여성들의 연대'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거짓말이 소문이 되고 그 소문으로 인해 가해자가 된 사람이 어떻게 상처를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있다. 오히려 한국의 <스카이 캐슬>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ost 'We All Lie'가 말해주듯이 캐슬 주민들 가족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인물들이 하나둘 거짓말을 하고 있고 그 거짓말이 미치는 파장은 엄청났다. 하버드에 다니고 있지 않으면서 하버드에 다니고 있다고 하거나 곽미향이 한서진 행세를 한다거나. 이들 인물들이 거짓말을 했던 이유는 각자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인물들이 즐비한 가운데 <빅 리틀 라이즈>의 셀레스트가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자신의 아들이 가해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애써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피해자 부모(로라 던)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는 점이다. 그리고 피해자 부모도 거짓 루머에 휩싸였던 아이의 엄마(쉐일린 우들리)에게 사과한다. 스카이 캐슬에서도 그랬지만 부모들의 전쟁 와중에도 빛이 나는 건 성인 같은 아이다. 스카이 캐슬에서는 서준(김동희)이 그랬고, <빅 리틀 라이즈>에서는 가해자로 몰렸던 이안 아미티지가 그러했다. 보통의 어린애라면 내가 가해자 아니라고 엉엉 울었을 텐데 철든 아이는 그 순간에도 누군가의 괴롭힘을 당하는 피해자(다비 캠프)를 세심하게 배려했다.
완벽한 인생은 완벽한 거짓말이다. 완벽한 인생은 없다.
"타인의 인정에 의해 내 자존감은 규정되어 왔어."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는데 시즌 1 통틀어 제일 기억에 남는 대사는 셀레스트(니콜 키드먼)의 대사였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타인의 인정에 상관없이 자신의 소중함을 잃지 않고 자신을 드높일 줄 아는 사람이다. 한국사회에서 자존감 높은 사람으로 살아가기란 어렵다. 실제로 주변을 봐도 자신의 부족함에 연연하는 사람이 많다. 잘난 사람일수록 자신의 부족함에 주목하고 결핍을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친구에게 건네는'넌 충분히 잘났어.'라는 말은 위로가 되지 않았고 '나보다 잘난 사람이 너무 많아.'라는 다소 씁쓸한 말로 돌아오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어찌 보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다.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규정되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셀레스트 역시 결혼 전에는 잘 나가는 변호사였고 체면치레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정신과 의사와 상담할 때, 뻔뻔한 남편이 폭력을 일삼아 왔으면서 의서 앞에서 어깨를 조금 건드렸다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면서 역겨웠다.(자신의 행동이 폭력이라는 것을 인지하니까 눈치를 보면서 말을 얼버무렸다는 것인데 알면서도 그 행동을 행하는 게 더 나쁘다.) 그 말에 반박하지 못하는 그녀 역시 안쓰러웠다. 아니 어쩌면 반박을 못하는 게 아니라 정신과 상담을 받으면서도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여길지 알고 수치스러우니 애써 아닌 척했을 것이다. 셀레스트는 타인의 시선을 중시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자존감과 자존심은 조금씩 비슷하면서도 달라서 혹자는 자존감은 높은 게 좋고 자존심은 높아서 좋을 게 없다고들 하지만 자존심, 자존감도 적당히 높은 게 중요하지 않을까. 자존심이 높은 셀레스트를 무너뜨린 것은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였다. 그녀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꾸짖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편에서 정말 그녀를 위해 기다려주는 것이 의사 선생님의 멋진 태도였다.
빅리틀라이즈는 2017년 에미상 8관왕에 올랐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통념에 이 드라마는 여자의 편은 여자여야 한다고 말한다. 장 마크 발레는 여성 감독이 아니라 남성 감독이다. 사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통념의 기저에는 질투라는 감정이 숨어 있다. 이 질투가 과하게 표출되어 여자들이 서로를 질투한다는 것인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왜 남자의 적은 남자가 아닌데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표현되는 것일까. 질투와 시기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기본적인 감정이지만 이를 겉으로 드러내느냐 안 내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질투를 상대에게 눈빛이든 행동이든 말로 드러내는 것은 미성숙한 사람이 하는 짓이다. 기형도 시인의 유명한 시에도 '질투는 나의 힘' 이 있듯이 상대의 장점을 발견해서 본받으면 되지 않는가.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말은 그런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빅 리틀 라이즈>에도 질투가 등장한다. 그러나 장 마크 발레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질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질투를 시기보다는 상대를 부러워하는 마음으로 표현한다. 완벽해 보이는 가정에 살고 있는 셀레스트를 매들린이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셀레스트의 실상은 너무나도 처참했다. 그리고 매들린(리즈 위더스푼)은 상대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마음으로 사과한다. 친한 친구에게조차 남편의 폭력과 멍든 자신의 상태를 말하지 못하는 셀레스트(니콜 키드먼)에게 나는 좋은 친구가 아니었구나 하고. 상대를 부러워해도 대놓고 표출하는 악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로라 던이 쉐일린 우들리를 피해자 엄마로 몰고 갔다가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쉐일린 우들리가 이를 받아들이는 장면도 지나치게 이상적이긴 하나 감독이 강조하고자 한 '여성의 연대'로 가는 과정이었다. 여성의 연대의 피크는 시즌1 마지막 에피소드 엔딩에서 드러난다. 스포가 될 것이니 말하지는 않겠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막장 드라마의 고전으로 불리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이다. <빅 리틀 라이즈>를 어찌 보면 막장이라고 볼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각 가정에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완벽한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도 완벽한 인물은 없지 아니한가. 모든 게 완벽하면 좋겠지만 신이 아닌 인간이라면 그러기 쉽지 않다. 완벽한 가정은 없지만 행복한 가정은 있다. 드라마에서 모든 가정이 행복하게 그려진다면 얼마나 재미가 없겠는가. <빅 리틀 라이즈>에도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한 가정이 등장한다. 불행한 면이 존재하나 이 드라마는 막장이 아니다. 입체적인 인물들 개개인의 사연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고 완벽한 가정이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여성의 편일 수 있는 것은 여성밖에 없다는 이야기까지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보고 흔한 통념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남성의 적이 남성이 아니듯, 여성의 적은 여성이 아니다. 여성만이 여성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으니 적이 되지 말고 편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통념이 깨지지 않을까.